휴대전화가 울렸다. 친구였다. 수화기 너머 첫마디부터가 불덩이였다.
“삼시 세끼 밥상 차려 바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온종일 거실 소파에 누워 리모컨만 돌리고 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나지, 안 나겠어?”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오늘 아침은 뭐야?” 하고 묻고, 밥상 물리기가 무섭게 소파에 드러누워 뉴스 채널과 홈쇼핑을 번갈아 돌리고, 마트에 가려 하면 따라붙는 남편. 베란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면 뒤에 와 서 있고, 빨래를 널고 있으면 “내 티셔츠는 어디 있어?” 하고 묻는단다. 친구는 “안방에 가면 문턱에 서 있고, 부엌에 있으면 부엌으로 따라와. 숨이 막혀.” 하고 거의 울먹였다
친구는 남편이 퇴직하면 둘이 여행도 다니고, 젊은 날 미뤄 둔 다정한 시간을 되찾을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퇴직 후의 남편은 동행자가 아니라 하루 종일 집 안을 배회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내 공간, 내 시간, 내 평화가 통째로 약탈당한 기분이야. 이대로 가다간 황혼 이혼 서류에 도장부터 찍게 생겼어.”
전화를 끊고 나서도 친구의 집 거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가운데가 푹 꺼진 소파, 아무렇게나 놓인 리모컨, 텔레비전 화면만 바라보는 남편의 옆얼굴, 그리고 그 곁을 맴돌다가 결국 부엌으로 숨어 들어가는 친구의 뒷모습까지.
사실 그 푸념은 친구만의 것이 아니었다. 요즘 내 또래의 아내들 사이에서 은퇴한 남편 이야기는 낯선 화제가 아니다. 젊은 날에는 얼굴 보기 힘들어 서운했는데, 막상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숨이 막힌다는 것이다. 한때는 웃어넘겼던 ‘은퇴 남편 증후군’이라는 말이 어느새 우리 세대의 풍속도처럼 번져 있다.
생각해 보면 집은 남편이 생각하는 안식처와 아내가 지켜 온 생활의 현장이 조금 다르다. 남편에게 집이 이제야 몸을 풀어 놓는 자리라면, 아내에게 집은 오래도록 자기 질서와 리듬을 쌓아 온 삶의 자리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빨래를 개고, 반찬통의 자리를 바꾸고, 오후 햇살 드는 곳에 잠깐 앉아 허리를 펴는 시간까지, 그 모든 것이 아내가 몸으로 익힌 하루의 결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한가운데로 커다란 몸집 하나가 들어와 소파를 차지하고 동선을 바꾸어 놓는다. 아내가 숨이 막힌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남편이라고 억울하지 않을 리 없다. 그들 역시 평생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텨 온 세월이 있다.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 돌아오고,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막아 내며 살아온 시간들. 그에게 은퇴는 비로소 허락된 쉼표일 것이다. 그러니 은퇴 후의 갈등은 어느 한쪽의 잘못이라기보다, 너무 오래 각자의 자리에서만 살아온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서 다시 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낯선 통과의례에 가깝다.
우리 집 남편은 퇴직 후 오히려 살림을 도맡다시피 한다. 처음에는 마트 심부름 정도로 시작했다. “두부 한 모랑 대파 좀 사 와.” 하면 꼭 비닐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돌아왔다. 두부와 대파만 사 오면 될 일을 콩나물도 사고, 달걀도 사고, 내가 좋아하는 귤까지 한 봉지 들고 와서는 “이왕 간 김에 샀지.” 하고 웃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는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라 한참 서 있기도 했다. 두부를 김치 칸에 넣어 두었다가 내가 한참을 찾은 적도 있었고, 상추를 냉동실에 넣어 반쯤 얼려 놓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채소는 거기 넣는 거 아니야.” 하고 다시 가르쳐야 했다.
그러던 남편이 요즘은 제법 살림꾼이 되었다. 아침이면 먼저 일어나 세탁기부터 돌리고, 빨래가 다 되면 베란다에 나가 티셔츠의 어깨선을 탁탁 펴서 넌다. 청소기를 돌릴 때는 소파 밑까지 몸을 숙여 먼지를 훑어내고, 분리수거 날이면 페트병 라벨을 떼어 봉투를 묶는다. 저녁때가 되면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오늘은 애호박이 있네. 된장찌개 끓일까?” 하고 묻는다. 한때는 회사 서류와 숫자만 들여다보던 사람이 이제는 두부의 날짜를 확인하고, 마른 멸치를 볶아 반찬통에 담아 넣는다.
며칠 전에는 설거지를 끝낸 고무장갑이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엎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물기를 털어 손가락 끝까지 반듯하게 맞춰 둔 모양이 꼭 성격 급한 남편답지 않아 웃음이 났다. 그 앞에서 나는 한동안 남편의 등을 바라보았다. 젊은 날 넥타이를 매고 허둥지둥 현관을 나서던 등이 어느새 앞치마 끈을 맨 등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등은 조금 둥글어졌고, 어깨는 예전보다 좁아 보였다. 세월은 사람의 얼굴보다 등을 먼저 바꾸는지도 모른다. 그 등을 보고 있으면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친구의 분노를 들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이 일었다. 은퇴한 남편이 문제라기보다, 은퇴 후에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있으리라 믿는 우리의 기대가 더 큰 문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직장을 내려놓는 순간 남편의 하루는 달라지고, 그 변화는 곧 아내의 하루도 바꾸어 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예전의 거리와 예전의 역할을 붙들고 놓지 못한다. 서로의 기대는 번번이 비껴가고, 서운함은 쉽게 원망으로 번진다.
친구는 요즘 ‘자발적 독립 선언’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 생각이 꽤 괜찮다고 여겼다. 부부라고 해서 하루의 모든 시간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노년의 부부에게는 적당한 거리와 각자의 숨구멍이 더 절실한지도 모른다. 함께 밥을 먹되 따로 걷는 시간도 필요하고, 한집에 살되 각자의 세계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마주 앉았을 때 서로를 원망 대신 안부로 맞이할 수 있다.
친구의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생각했다. 황혼 이혼보다 먼저 배워야 할 것은 황혼의 동거 기술인지도 모른다고. 소파에 누운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과 그 등을 보면 짠해지는 마음이 한집에 함께 사는 것처럼, 노년의 부부란 결국 미움과 연민과 고마움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늙어가는 사이일 것이다. 오늘도 어느 집 거실에는 리모컨을 쥔 남편이 소파에 기대어 있고, 어느 집 부엌에는 한숨을 삼키며 국을 데우는 아내가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이 다툼의 예고가 아니라, 서로의 속도를 다시 맞춰 가는 저녁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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