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제 눈물 흘리지 마세요

5월8일 어버이날 특집에 응모한 글입니다. 괞찮을까요? 주제: 아버지 어머니 이제 눈물 흘리지 마세요 =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 1983년 1월30일 결혼하여 줄 곳 복잡하던 서울에서 살다가 얼마 전 전주로 이사 온 51세의 이규남입니다. 이 곳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의 제 눈의 눈물은 남을 원망하고 나 자신을 원망하고, 부모를 탓하며, 팔자 운운하며 울었던 눈물이였습니다 이제 지금의 눈물은 “아버지! 감사합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오빠! 감사합니다.”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립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5시면 “감사합니다.”하며 일어납니다. 그 동안 잘못 살았던, 제 생활을 만회하고자 ‘아침 형 인간’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자랄 적, 저의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부모님은 저의 4남매를 모두 대학공부를 시켰습니다. 귀에 따쟁이가 앉도록 하신 아버지의 말씀 “ 난 일자무식이다 너희 4남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겠다. 성공을 하려면 1대에선 이루기 힘들다. 3대는 가야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너희가 기반을 닦아 놓으면 너의 자식은 성공을 하기가 쉬울 것이다.“하셨습니다. 1등- 그것도 전교 1등이 아니면 입학금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전 예외이긴 했지만 청주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충북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30살의 늦은 결혼을 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의 결혼은 실패한 작품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저의 시 부모님께 우리 딸을 돌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출가외인’이란 말 한마디로 눈물을 삼켜야 했고 전 자식을 못 낳은 댓가로 6년간 마음 고생을 하며 시동생은 자세히 알지도 못한 체- 시 부모에게 생활비 안주고, 친정 부모에게 돈을 주었다며, 저를 죽이겠다고,칼을 들이 대며 야단을 쳤고, 거짓말쟁이, 정신이상자로 내 몰았습니다. 또한 15살 아래의 시누는 -자식도 못나는 병신이 왜? 우리 오빠에게 빌붙어 사느냐고 욕에 욕을 하며, 발길질에 구타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저의 부모님은 시집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습니다.( 같은 고향에 살았음) 저의 큰 오빠- 명절이라 고향 내려가면 여동생 하나 잘 봐 달라고 우리 시집 먼저 들려 고기며, 약주며, 사 가지고 저의 시집에 먼저 인사 했습니다. 하지만 무식한 저의 시집 식구들이 이를 알 길이 없지요. 저는 7년 만에 얻은 저의 딸을 잃어 버릴까봐, 아니,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으려고 어느 날인가부터 시집과는 남남이 되었습니다. 명절이면 갈 곳이 없어 딸 아이와 둘이서 있어야 했고 가끔씩 친정 나들이를 했답니다 . 하지만 남들의 눈에 비친 저의 생활은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가정으로만 보였습니다. 그러던 저에게 IMF가 오면서 저의 딸 초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에 신랑의 직장도 잃었습니다. 처음엔 설마 설마하며 잘 견뎌냈습니다. 하루 이틀, 한해 두해, 세월이 가면서 전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24시간 침대 위에서 생활을 했고. 남들이 활동하는 낮 시간이 싫어 어두운 안방의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청했고, 밤이면 TV앞에서 게임기와 열심히 씨름 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억울하여 소리 내어 울다가 멀리 김해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저! 좀 살려 주세요”하며 엉엉 울다보면 어느 새 오셨는지 잠자는 제 옆에 엄마가 소리 없이 울고 계시는 거예요.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가요. 멀쩡한 신랑은 놔 주고 말입니다. 제가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엄마 뿐 이였나 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저의 울 타라가 되어 주지 못했던 신랑은 자포자기인지 능력이 없는지, 지금껏 돈 한 푼 벌어다 주지 못하고 당뇨 550의 환자가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라고 식이요법이며, 운동요법 하나 하지 않습니다. 저를 습관성 잔소리꾼으로 치부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곳 전주로 이사 오면서 저의 생활은 180도 확 변했습니다 친정 큰 오빠의 우여 곡절한 도움으로 커다란 타이어 대리점을 오픈 했습니다. 먹고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섰고 성공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니까 저의 미래가 - 잘 살 수 있다는 , 저의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다는, - 희망이 보입니다. 1년이면 몇 번씩 택배 속에 반찬이며, 고기며, 생선이며, 꼬기 꼬기 싸맨 돈 뭉치며 보내 주시던 저의 엄마에게 - 77세가 되신 저의 엄마에게 이제야 우황 청심환을, 케토 톱을 사들고 찾아 갑니다. 아버지께서는 15년 전 하늘나라에 가셨고 엄마에게 “ 엄마! 오래 오래 사세요”합니다. “ 제가 성공한 모습 보여드리고 싶습니다”하며 얼마 전에 건강 보조식품을 사다 드리고 왔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이제 울지 마라 꼭! 잘 살아라.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한다” 하시며 웃으십니다. 저는 엄마 앞에서 엉엉 소리쳐 울었지만 저는 저의 엄마가 우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 앞에서는 항상 웃으시며, 질투가 날 정도로 씩씩하게 사셨습니다. 오빠 품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에 마음이 아파 하루 두끼만을 고집하셨습니다. 살찌면 안 된다고, 좋은 음식 드시면 죽을 때 고생하신다며 말입니다. “엄마! 이제 저 잘 살 수 있어요. 꼭! 성공 할께요,”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훌륭하십니다“하며 자신 있게 남에게 이야기 하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 딸로 인해 가슴 아파 하시며 속으로 눈물 흘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전주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저의 미래가 펼쳐지기에 온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무척이나 행복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며 모든 사람을 용서하며 포용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나도 모르게 감사의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이제 울지 않겠습니다. 엄마도 웃으시며 제 걱정 하시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