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씩 젖어오는 가을비에 우리집도 이제는 가을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바로 엊그제 너무 덥다고 남편과 선풍기로 바람싸움 하느라 참 바빴었는데, 벌써 긴 팔 티셔츠에 밤이면 춥다고 이불 전쟁을 하고 있으니, 이렇게 빠른 세월을 과연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여보, 정말 요즘 나에게 너무 무관심한거 아냐? 당신만 바쁘다고 혼자 볼 일 보러 다니면 그만이냐고."
"무슨 말이에요? 뭐가 무관심하다고..."
"뭐야? 정말 몰라서 묻는거야? 내가 한번 다 말해볼까?"
"그래요, 어디 한번 말해봐요, 내가 뭘 그렇게 당신한테 무관심했는지."
"그래, 좋아. 당신 기억이 안나나본데, 내가 다 기억나게 해주지."
그동안에 쌓인게 많았던지 남편은 내 앞에 앉아 천천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조금은 서글퍼 보이는 남편의 표정에 가슴이 아파왔다.
"첫째, 당신이 요즘들어 언제 내 속옷 한번 제대로 챙겨줘 본 적 있어?
물론 바쁘다는 건 나도 알아. 힘든 집안일에 또 틈나는대로 피아노도 배워야하고, 또 다른 일들도 많겠지. 그래도 요즘은 당신이 정말로 나 옷 한번 챙겨줘 본 적이 없었어. 애들옷은 말할 것도 없지만말야."
"아, 맞다. 내가 그랬구나..."
"그것뿐인줄 알아? 당신이 바쁘면 항상 내가 세아이들 밥 챙겨 줘야지, 또 아들들 학교에 대해서 신경한번 써봤어? 숙제는 제대로 하는지, 준비물은 어떤건지, 일기는 쓰고 있는지, 속옷은 잘 갈아입고 있는지..."
"맞아, 내가 그랬어. 맞아. 듣고보니 당신 말이 다 맞아요. 미안해요."
정말 그랬다. 요즘의 내 모습을 남편은 너무나도 정확하게 잘 꼬집어 주었다.
내 일이 바쁘다고 집안일은 온통 남편에게 맡겨 버리고, 밤에는 뭐가 그렇게 피곤하다고 이불위에 눕기만 하면 잠이 들어 버리는지...
세 아이들까지 남편에게 맡길 만큼 난 무슨 용무가 그리도 많았을까?
남편을 위한 식사준비 한번 정성스레 준비해 본 지가 벌써 언제였나.
그냥 급하게 찌게 하나 달랑 상 위에 올려놓고, 항상 바쁘다고 서둘러 밥상을 재촉하기만 급급했던 나였다. 지독하게도 이기주의였던 나였다.
그런데, 왜 난 그런 내 모습을 뒤돌아 보지 않았을까?
남편의 아내로, 세 아이들의 엄마로 그 자리를 지키려는 노력이 너무나 필요한 현실임을 늦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남편의 충고 덕분에.
아무리 바깥에서 내 일이 바쁘다해도, 가족을 위한, 남편을 위한 기본적인 배려를 내팽겨치지는 말았어야 했는데...
예전의 나는 남편이 일끝내고 들어오면 피곤하겠다며 목욕하고 들어오는 남편을 위해 깨끗한 속옷을 준비해서 일부러 입혀주기도 했다. 몸에 묻은 물기도 닦아주고, 앞에서 예쁜 재롱도 피워보곤 했었는데...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일에 지쳐 몸이 너무 피곤하다고, 짜증만 부리고, 남편 앞에서 함부로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남편을 아예 무시해 버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요즘 왜 그랬을까?
지금 나에게 남편을 위한 아내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진심으로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힘들고 지쳐 있을 남편을 위해, 오늘부터라도 정성어린 준비를 해둬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여보, 사랑해. 그리고 미안해. 하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이렇게 부족한 나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사랑해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