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연시가 다가오면 누구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고 한번쯤 “올 한해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뒤돌아보기도 하겠지요?
제게 올 한해는 더욱 남달랐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살던 이십대, 이젠 정말 어른이 되었다는 자신감으로 시작한 삼십대,
하지만 몇 번 제 잘난 맛에 살다가 무너지기를 경험한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계속 이렇게 갈 수 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이 무엇을 위해, 왜 사는지를 철학적인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오로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위해 바동거리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인도 캘커타 행을 결심했습니다.
‘그래, 남은 인생을 위해서 1년 인생 공부하고 오자. 나를 낮추고 봉사하다보면 무언가 보이겠지.’
인생 공부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을 누가 만들겠습니까?
그저 저에겐 몇 년 전 인도 여행 중 만났던 하얀 사리 (전통 인도여인의 옷)의 수녀님들, 그 밝은 미소가 기억났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더 테레사에 대한 막연한 궁금증이었지요.
올해로 마더 테레사가 돌아가신지 10년입니다. 그래서인지 제게 조금은 더 특별한 여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빈민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한 수녀로, 그리고 간디와 더불어 또 하나의 인도를 대표하는 정신적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수녀회, 사랑의 선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130여국이 넘는 나라에 500여 곳 이상의 센터를 운영하는 큰 규모의 수녀회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본원인 캘커타의 마더하우스는 1953년 처음 그대로의 작은 골목 귀퉁이 건물입니다.
그래서 종종 마더 테레사의 유명세만 생각하고 찾아온 관광객들은 그 유명세와 달리 조촐한 수녀원을 보고 놀라고
또 수도원 안에 있는 마더 테레사의 하얀 대리석 무덤에 두 번 놀랍니다.
수녀원의 모습은 마더 테레사의 근검절약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1948년 처음 수녀회 설립당시 동냥해온 음식을 모아 그날의 끼니를 해결했던 초기 수녀님들의 정신을 잊지않으려 수녀님의 삶을 저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 많은 기부금은 어디에 두고 이 수녀원이 이렇게 단촐한가’ 수녀님들을 의심스런 눈으로 본 적도 있지만 계속적으로 생겨나는 여러 나라의 센터를 보면 그 쓰임이 처음 마더 테레사의 봉사정신에 반하지 않을 꺼라 믿습니다.
또한 수녀님들이 그런 마더 테레사를 좀 더 가까이 모시기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자가 풍부해지고 명성이 쌓일수록 흔들리지 않고 수도생활을 하는 것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수시로 만질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어머니가 곁에 계시길 바랬나봅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나 서양에서도 수녀원 한 자리를 차지한 대리석 무덤은 꽤 낯선 광경입니다.
비석이나 기념비가 아닌 정말 수녀님의 사체를 수녀원 안에 묻고 대리석으로 묘를 만들어 두었으니까요.
하지만 첸나이에 있는 도마(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성인의 무덤,
폰디체리에 있는 오르빌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 스리 오로빈도와 알파사의 무덤,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한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도 샤자한 왕이 그의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들었듯
죽은 이를 가까이 두고 기억함이 어쩌면 인도인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무덤을 찾는 이들은 유명인부터 길거리 노숙자까지 참 많습니다.
관광객이 아닌 대부분이 천주교인일 것이란 예상을 뒤집고 힌두교와 무슬림의 끊임없는 방문에 무척 놀랐습니다.
“당신이 힌두교면 더 정직한 힌두교로 사세요. 무슬림은 더 좋은 무슬림으로, 천주교는 더 좋은 천주교로, 그렇게 살면 되는 겁니다.”
생전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내 방식으로 바꾸려 하기보다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보듬어준 마더 테레사의 이 말씀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많은 이들이 그녀의 무덤을 찾고 진심어린 존경을 표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싶습니다.
지난 8개월간 저는 캘커타에서 참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곳 봉사자의 활동은 오전이나 오후를 선택하여 기본적인 빨래와 설거지, 청소, 식사도우미, 말벗 등 입니다. 하지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점점 봉사시간을 늘리게 되고, 좀 더 필요한 부분을 보게 되고, 스스로 알아서 일을 찾아 하게 되더군요.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죠.
오로지 돈을 벌기위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돕고자,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는 것은 돈을 벌 때 느끼는 에너지와는 또 다른 에너지를 줍니다.
저의 하루 일상을 알려드릴까요?
보통 새벽 5시에 일어나 30분을 걸어서 수녀원에 도착하면 아침 미사를 드리고 나머지 봉사자들을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식빵 한 쪽, 바나나 하나, “짜이”라고 부르는 밀크티 한잔뿐인 식사지만 밝은 미소와 함께 나누면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식사가 끝나고 모든 봉사자들이 떠나면 설거지와 바닥청소를 하지요.
걸레질까지 끝나면 오전봉사는 시작도 못했는데 벌써 하루 종일 흘릴 땀을 다 흘린 것처럼 몸은 땀으로 졌어있습니다.
12시, 오전 봉사가 끝나면 3시 오후 봉사가 시작될 때까지 점심을 먹고 샤워하고 잠깐 낮잠을 잘 수 있는 휴식시간입니다. 캘커타의 무더운 날씨와 싸우려면 잘 먹고 틈틈이 쉬어주어야 합니다.
오후봉사는 빨래를 하고 환자복을 기우는 것입니다. 독한 세제로 매일 빨아대는 통에 환자복은 쉽게 찢어지기 때문에 옷을 기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느 날 빨래를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 산처럼 쌓인 찢어진 환자복을 보고 수녀님께 부탁해 미싱을 배웠습니다. 이제 겨우 찢어진 것 기우는 수준이지만 정말 정성을 모아 기쁘게 했습니다.
한 땀 한 땀 기우면서 그 옷을 입을 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평생 이렇게라도 옷 한번 기워드리지 못한 내 부모님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제겐 참 행복했습니다.
틈틈이 수녀님을 도와 새로운 봉사자들의 오리엔테이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엔 수녀원을 찾는 봉사자들, 여행객들에게 수녀원과 센터에 대하여 설명하고, 한국으로 떠나실 수녀님들께 한국어도 가르쳐드리고, 컴퓨터 작업도 도와드리고...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즐겁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6시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그리고 한 시간 묵상 시간을 갖습니다.
하루를 돌아보고, 나를 돌아보는 황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녁묵상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8시. 엉터리라도 밥 한 끼 작은 버너로 해먹고 지친 몸을 침대에 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처럼 잠이 듭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렇게 힘들던 일도 하나둘 잊고, 용서할 자신이 생겼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점차 너그러워졌습니다.
꼭 내 계획대로, 내 방식대로가 아니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0월, 한국에 언니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은 좀 더 있고 싶은데... 지금 이대로 조금만 더...’하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고 아쉬움도 있었지만 어쩌면 지금이 바로
떠나야 할 때라고 느꼈습니다.
어느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물었답니다.
“센터가 봉사자 없이도 운영이 가능하다면서 왜 이렇게 많은 봉사자들을 받고 있습니까?”
“센터가 봉사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자들이 이곳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보고 경험한 사랑의 힘을 마음에 담아 고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나라에서, 각자의 집에서
나보다 더 불쌍한 이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들에게 이곳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제게 캘커타는 사랑의 힘, 치유의 능력을 보여준 곳입니다.
종교를 초월하고 조건을 초월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힘을 준 곳입니다.
저에게 봉사는 이제 시작인 것 같습니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라고 했던 마더 테레사의 말씀처럼 저도 이제 가족에게로 돌아와,
가족 안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가끔은 차라리 아예 모르는 남을 돕는 게 속 편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더 보듬어야 하는 것이 가족이겠지요.
지난 8개월, 캘커타에서 내 주위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니 남은 4개월은 배운 것을 실천해보려고 합니다.
사랑은 어려운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사랑을 담아 그 일을 하는가라고 합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도 제게는 실습의 시간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저는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씩씩한 발걸음으로 자신 있게 사랑할 수 있겠지요?
교동에서
유임경
010-4443-8088
P.S.: 캘커타에서 찍은 마더 테레사의 무덤 사진을 첨부하려니 안되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