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모시고 삼형제의 맏며느리로 시집와 다달이 빠지지 않고 있는 제사와 일손 놓을새 없이 힘들게 살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내가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이려니 생각하시고 인내하시며 사시던 우리 엄마...
할머니 성격 또한 깐깐하시고 아버지는 아주 보수적이시며 다혈질인 성격으로 아버지 말씀이외는 귀담아 듣지
않으시던 전형적인 조선시대나 계실법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완고하신분.
시동생 두분 결혼까지 시키셨으나 집안 대소사때면 바쁘시다며 내려오지 않으셔도
"오죽 바쁘면 못 내려 올까?" 하시며 오히려 걱정하시던 우리엄마...
우리 육남매까지 키우시느라 형편이 어려워 언제나 엄마의 밥그릇은 충분치 못했음에도 아쉬워 하는 자식을 보면 엄
마는 배부르다며 덜어주시던 우리 엄마...
배부르게 한번 못드셔도 일은 언제나 고됬고 아버지는 풀리지 않거나 조금만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엄마에게
화풀이 하시며 물건을 마구 집어 던지시기도 하셨지만 말한마디 대꾸 안하시고 받아 주시던 우리 엄마...
그렇게 언제까지 힘든일 다 받아 주시며 그자리에 우뚝 서 계실것만 같았던 엄마가 쓰러지시자 아버지께서는
그제야 엄마가 차지하고 계시던 소중함을 깨달으시고 후회하시며 정성껏 병간호를 하셨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초를 캐거나 구하러 산이나 들로 안가신데가 없고 산에 올라 가셨다가 굴러서 다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구해오신 약초를 손수 달여 먹이시고 거동이 불편한 엄마의 몸이 굳으면 안된다며 매일 모시고 나가서 운동삼아
산책을 하셨습니다.
우리 육남매는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아버지 혼자 힘드실것 같아 주말에 쉬시라고 권해도
아버지께서는 엄마를 너무 고생시켜서 쓰러지셨다며 이제는 아버지가 갚아야할 차례라며 우리에겐 엄마의
병수발을 못하게 하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모시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시며 한시간 거리에 있는 유명한 한의원에
침을 맞히러 다니셨으며 대소변도 받아 내셨습니다.
언제나 하시던 아버지 말씀은
"잘살던 집 막내딸 데려와서 고생만 시키고도 잘해주지 못했으니 내가 벌받아 싸지 이제와 후회한들 돌이킬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발들어줄 기회라도 줬으니 다행이지" 하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께서는 갑자기 쓰러지셔서 돌아가시게
되었고 아버지 안계신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모르지만 그날부터 엄마마저도 상태가 점점 안좋아지시더니
일년뒤 아버지계신곳으로 따라 가셨습니다.
엄마는 생전에 힘들다, 아프다 소리 한번 안하시고 우리에게는 웇는 얼굴만 보여 주려고 애쓰시며 사셨고 가끔 부엌
부뚜막에 혼자 앉아 긴한숨을 내쉬며 넋놓고 계시다가 우리가 "엄마 뭐해?" 하면 아무일 없던듯
"응, 아냐 그냥 잠깐 앉아 있었어" 하시며 털고 일어나시던 우리 엄마...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면서 언제나 "나는 엄마처럼 안살거야" 되뇌이던 나도 자식을 키우며 살다보니 엄마처럼은
아니지만 자식에게 힘들때 힘든 모습 슬플때 슬픈 모습을 보이는게 얼마나 싫던지요.
엄마의 마음을 이제와서 조금씩 헤아려가며 하얗게 세가는 머리를 거울로 보고있자니 그속에 비친 엄마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엄마.. 사랑하고 무척이나 뵙고 싶습니다.
신청곡 하동진씨의 밤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