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초겨울, 그때 저는 대학졸업반으로 올라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보다 세 살 위인 오빠가 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왔습니다.
"너 이번에 투표할 거지?
투표하면 미팅 시켜준다."
솔직히 그 공약에 솔깃했습니다.
평소에 정치라곤 아무 관심도 없이
놀고 먹고 마시는 데 열중하던 제 귀가 번쩍 뜨인 것은
오로지 '미팅'때문이었습니다.
좀 잘나 보이는 오빠를 둔 덕분에
친구들로부터 소개팅 좀 시켜달라는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거든요.
혹시나 하고 다음날 오빠의 공약을 친구들에게 흘려봤습니다.
역시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제 등을 떠밀더군요.
당시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저는
주소지가 전주로 돼 있어서
투표를 하려면 전주까지 기차를 타고 내려와야했습니다.
한 학기에 집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저로써는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죠.
그런데 '미팅' 한 마디에 기차표를 끊어주는 친구,
점심을 사주는 친구, 대리출석 3회를 해주겠다는 친구...
참 제 친구들이지만 별나게도 '미팅'에 목을 매더라구요.
여튼 여차저차해서 대선이 있기 전날,
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평소때 같으면 꾸벅꾸벅 졸았을 텐데 그날따라 잠이 안 오더군요.
옆에 앉으신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옵니다.
"서울에서 학교다니는가 보네.. 집에 가는 길이고?"
"네, 내일 투표하려구요."
별 생각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한 10분쯤 지났을까요?
맞은편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가 캔커피를 내미는 겁니다.
"일부러 투표하러 가시는 거에요? 정치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어라... 이 남자가...
그렇습니다. 그 남자는 투표를 하기위해 일부러 긴시간 고향길을 마다않는
제 열정이 좋아보인다는 겁니다.
좋아하는 정치인이며 어떤 후보를 찍을 건지... 왜 그런지 등에 대해 물어보는데
오빠한테 띄엄띄엄 주워들은 걸로 때우려니 어찌나 식은 땀이 흐르던지...
그러다 어느새 그 남자와 저는 연락처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투표를 마친 후 둘은 나란히 서울행 기차에 다시 몸을 싣고 있었죠.
그 남자요? 지금은 제 남편이 되었습니다.
올해 벌써 결혼 10년차를 맞네요.
당시 우리가 누굴 선택했는지는 제목보고 아시겠죠?
그러고보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만 좋은 일을 하신 게 아니라
저희 부부한테도 평생 감사드릴 일을 하셨답니다.
너무 늦었지만 가시는 길에 꼭 인사드리고 싶어요.
'대통령님,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