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수님!
윤 승희. 이 덕형님 올 한해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덕형진행자님께서는 전라북도 연극상 대상을 수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70년대쯤에는 눈도 많이 오고 날씨도 요즘 보다 무척 추웠나 봅니다.
12월에 내린눈이 방죽에나 또랑에는 20cm 이상 두껍게 얼음이 얼고
높은산의 음지쪽에는 하얀눈이 무릎높이보다 더 쌓여 3월쯤에나 녺았는데
기후도 변하여 산간지역보다 서해안쪽에 많은눈이 내리네요.
올해는 벼 농사가 그 어느 해 보다 풍년이라고 합니다.
농민들은 생산비도 안되는 쌀값을 올려달라 벼 수매량을 늘려달라 연일 목이 터져라 외칩니다.
김이 모락 모락 나는 쌀밥을 보면 목에 침부터 넘어 갑니다.
요즘 결혼식장의 축하객들에게 식사대접이 대부분 부페식당입니다.
부페식당에 들어서면 쌀밥부터 한공기 푸고 나머지 음식을 담습니다.
나 어린시절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때 1년에 몇번 먹어보는 귀한 약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봄에는 고사리를 뜯고 여름에는 칡이나 산도라지를 캐오면
어린4남매는 그늘 아래에서 도라지 껍질을 손톱으로 벗깁니다.그걸 햇빛에 잘
말려 읍내장에 내다 팔아 보리쌀과 밀가루를 사오셨습니다. 보리쌀을 한번 살짝
삶아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부엌천장에 매달아 놓았다가 저녁에 감자와 섞어 한번
찌면 보리밥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갔다와 배가 고픈 우리는 그 보리쌀을 손으로 집어 먹었습니다. 일을 하고
돌아온 엄마는 저녁에 먹을 보리쌀을 우리가 다 먹었다고 부짓댕이로 두어대씩
장단지를 때렸지만 그렇게 세게 때리지는 않고 때리는 시늉만 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해부터 남의집 일을 하려 다녔습니다.
어린것이 손때도 야물고 지게질도 잘 한다며 쌀밥을 놋그릇 가득 담아 주웠습니다.
쌀밥먹는 재미로 날마다 남의 일을 했습니다.
우리논은 산골다랭이 논이라 찬물도 들어오고 토질도 좋지 않아 쌀 수확량이 얼매
되지 않았습니다. 친구네 벼타작을 하려 가게 되었는데 논도 넓고 하루종일 햇빛도
잘 드는 곳이라 수확량도 많고 볏가마니도 쌀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날 저녁에
아버지에게 "아버지 우리 논 팔아버리고 울깃들 들판논 사요" 아버지는 입으로
담배연기만 내 뿜으며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 시절 추수가 끝난 이 시기에는 산에 땔감을 하는게 하루의 일이었습니다.
하루 두짐의 나무를 해다 놓고 저녁밥을 일찍먹고 서로 약속이나 한듯 종찬네 사랑방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겨울밤은 길고 돌을 먹어도 소화가 될 나이에 자기 아버지 어머니 생일은
몰라도 누구네 제사날은 잘들압니다. 집집마다 하루 두끼를 먹을 망정 조상의 제사에는 집안들이
60리 밖에서도 걸어오고 지극정성 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상이 노하여 집구석이
망한다고 하고 또 그렇게 되는줄 알았습니다.
새벽 닭이 울어야 제사를 지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단자>라고 하여 제사가
있는집으로 제사 음식을 받으려 가면 주인 아주머니는 큰 양푼에 음식을 골고루 담아 주웠습니다.
우리는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다음날 눈이 오면 산에 토끼 몰이를 나갑니다.
토끼뒤를 따라 뛰어 다니다보면 아무리 추운날도 온 몸에 땀이 나고 점심을 먹지 않아도 힘이
남아 돌았습니다. 그 친구들도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리고 나이 50줄에 들어 섯습니다.
나뭇짐을 지던 그 어깨에는 가정이라는 짐을 지고 쓰리질듯 하면서도 잘들 버텨 나갑니다.
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