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손님

첫손님

지난 월요일 아침 일찍, 국을 뭣으로 끓일까 고민하다가 집 앞 가게로 갔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주인아저씨는 긴 집게를 들고 어제 모인쓰레기를 불리수거하고 있었습니다. 야채진열장을 둘러보니 콩나물이 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내 눈을 의심하면서 물었습니다.

“콩나물이 없나요?”

“며칠 쉬어서 오늘이나 배달이 될 겁니다.”

콩나물 한 봉지 살까하고 갔던 터라 아무 생각 없이 가게를 나왔습니다. 국거리 장만을 못해서 다시 무슨 국을 끓일까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내가 첫 손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죄송한 맘이 들었어요. 첫손님은 하루 장사를 좌우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뭐 살게 없나 생각하고 돈을 챙겨 다시 가게로 갔습니다.

계란과 건전지를 골라 계산대에 놓고

“아까 죄송했어요. 아침부터 그냥 나가서요.”

“괜찮아요.”

주인아저씨는 평소 모습처럼 여전히 친절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그제야 내 맘도 편안해졌습니다. 첫손님이라면 기분 좋은 인연이길 바라는 맘은 누구나 같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올 해 얼굴은 모르지만 좋은 인연을 기억했습니다.

지난 1월 1일 새해 첫날 첫손님을 친절하게 맞아주신 분께 감사를 전하고 싶어 편지를 씁니다.

1일 아침, 새해를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어 광주 사는 오빠가족, 서울 사는 동생들에게 전화를 해 내려온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둘째동생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동생이 전화를 드리고, 저는 혼자사시는 큰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갑작스런 전화에 큰어머니는 우리 남매들끼리 만나는 자리라면 안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길이 미끄러워서 노인들이 이동하시기는 무리인 날이기도 했습니다. 남원에서 어머니가 오신다는 전갈을 드렸더니 그러면 오겠다고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시간 맞춰 모시러 가겠다고 하니까 운동 삼아 걸어오시겠다고 한사코 사양을 하셨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 출발하신다던 큰어머니가 저녁 6시가 되어 어둑어둑 해졌는데도 오시질 않았습니다. 모시러 갈 걸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여섯시가 넘자 집 전화가 울렸습니다.

“아이, 집이 무슨 아파트여?”

집을 못 찾고 계시나 싶어서 서 계신 곳에서 보이는 간판을 하나만 읽어 보시라고 했더니 의외로 남의 집에 들어가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가 거성 아파트라는디.”

순간 거성이라는 말에 그런 아파트가 있나 싶어 주변 아파트 이름을 외워봤더니 감이 잡혔습니다.

“거성 1차예요, 2차예요?”

“2차라는디. 어딘가 알겄어.”

“경비실이 어딨나 물어봐서 경비실에서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갈게요.”

외투를 걸치고 계신 곳을 찾아갔습니다. 낮 동안에 녹아내리던 길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해 내가 걷기도 조심스러웠다.

어둠 속에서도 나를 알아보신 큰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습니다.

“아이고 인자는 혼자 어디도 못 다닌단개.”

혼자 오시겠다고 하실 때 끝까지 모시러 가겠다고 말씀을 드릴 걸 후회했습니다. 아직도 서울 조카들 집을 맘대로 찾아다니시는 분이셨기에 별 의심을 안했었습니다.

우리 집으로 오는 내내 이리 들어갔다고 하셨다가, 그 길이 아니라고 하셨다가 하시는 모습이 영락없이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임을 확인했습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 전주에 처음 왔을 때 모래내시장, 중앙시장, 남부시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교복도 맞춰주고 가방, 신발도 사주셨던 큰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큰어머니와 우리 집의 거리는 걸어서 약 30분 거리입니다. 운동하기에 적당한 거리라며 걸어오신다는 말씀에 공감을 했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둠이 깔린 탓이었는지, 아파트 건물을 찾지 못하고 헤매신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휴대폰마저 말썽을 부려 전화도 못하고 애를 태우셨답니다.

긴가민가하면서 우리 집이 2층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찾아가신 아파트 2층으로 올라가 벨을 눌렀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낯설기에, 집을 잘 못 찾은 것 같다면서 휴대폰 배터리가 나갔으니 충전기 꼽고 전화 좀 하자고 말씀하셨답니다. 가방에 예비 배터리가 있는데도 당초 손에 잡히질 않더래요.

그랬더니 집 주인은 안 된다는 말도 없이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렸답니다. 집주인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새해 첫날 어스름할 무렵에 찾아온 낯선 손님이 미덥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길을 헤매고 마침 휴대폰까지 말썽을 부리는 노인 입장은 다급했답니다.

하는 수없이 아래층으로 와서 다시 벨을 누르셨지요. 그 집은 윗집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주인이 나와서 들어오라고 하더랍니다. 큰어머니 연세쯤으로 뵈는 어르신도 함께 사는 가족이었답니다.

큰어머니는 추위를 녹이면서 충전기를 꼽고 전화기를 켰지만, 화면이 초기화가 되지 않아 기능을 못 찾아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답니다. 마침 주인집 아저씨가 계셔서 전화기를 맡겨봤지만 역시 모르겠다고 하셨대요.

“우리 집 번호는 외우셨던 거예요?”

“외웠지만 생각이 나간디. 아까 적어서 주머니에 넣고 나왔지.”

다행인 것은 집을 나서면서 동생 집 번호와 우리 집 번호를 메모해서 주머니에 넣어 둔 것이 있어서 그 집 전화를 빌려 전화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애를 태우셨는지, 우리 집에 오셔서도 ‘이제는 혼자 어디 못 간다니까’를 되 뇌이셨습니다. 가방에는 준비해둔 배터리가 있어서 갈아 끼우고 전화기도 초기화면으로 맞춰드렸습니다.

큰어머니의 말씀을 듣는 내내 초인종소리를 듣고 모니터만 보고 인터폰도 들지 않았던 내 행동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누구보다 어렵게 참여해 주신 큰어머니가 계셔서 우리가족 첫모임은 즐거웠습니다.

지금 큰어머니는 더운 나라 인도네시아에 계십니다. 남동생이 파견근무를 나가 살고 있는데 친정어머니와 큰어머니를 초대해서 6일 날 출국을 하셨습니다. 먼 길 여행을 앞두고 설레는 맘으로 이런저런 준비를 하셨던 큰어머니가 행여 무슨 일이라도 날까봐 얼마나 맘고생을 하셨을까 생각하니 더 죄송한 맘이 듭니다.

참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낯선 방문객을 위해 문을 열어준 ‘거성근영2차’ 1층에 사시는 가정에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올 해 첫손님이셨을 텐데 친절을 베풀어 주셨으니, 올 해도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