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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클래스M] 조선시대 수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2025-05-17 2042
류동현기자
  donghyeon@j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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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급국안’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추안급국안은 ‘추안(推案) 및 국안(鞫案)’이라는 뜻인데요, 조선시대 중대 범죄의 심문과 재판 기록을 말합니다.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는 지난 2004년, 첫 번역을 시작해 10년만인 지난 2014년, 한글 번역판 ‘추안급국안’ 90권을 발간했는데요.


당시의 생활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조선시대 정치·범죄사회사 수사 재판 기록, 추안급국안을 통해 조선시대로 타임슬립 해볼까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조선시대 수사의 비하인드 스토리,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에 대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이충훈 아나운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변주승 소장님과 함께합니다. 소장님, 안녕하세요.


[변주승]

안녕하세요,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소장 변주승입니다. 저는 전주대 인문콘텐츠대학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로서 교육부의 인문학 지원사업인 HK+연구단장을 맡고 있고요. 사단법인 한국고전문화연구원장과 국사편찬위원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변주승]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이라는 단어,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진행자]

사실, ‘추안급국안’라는 단어를 오늘 처음 들어봤습니다.


[변주승]

그럴 수 있습니다. 추안급국안은 지금으로 치면 대검찰청과 대법원의 심문 재판 기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역죄와 같은 조선왕조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범죄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를 해치는 주요 범죄를 심문하고 재판 처리한 내용을 모아 작성된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심문 과정에서부터 피의자의 진술, 처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심문 대상은 고위 관리부터 평민,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법적 절차를 넘어 조선왕조의 사회상과 생활상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 일면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습니다.


[진행자]

추안급국안은 조선시대 수사 기록으로 볼 수 있겠네요. 우리가 사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죄인 심문 장면은 이 기록을 바탕으로 한 건가요?


[변주승]

네, 맞습니다. 추안급국안은 선조 34년인 1601년부터 고종 29년인 1892년까지 약 300년에 걸쳐 작성된 기록으로, 변란, 역모, 사학죄인, 왕릉 방화 등 중죄인을 심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추안급국안은 누가 작성했습니까?


[변주승]

이 기록은 왕의 명령으로 설치된 임시관청인 추국청(推鞫廳)에서 작성한 것으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추안'과 '국안'을 합한 문서 모음입니다. 사극에서 보면 흔히, ‘저 죄인을 국문하라’라는 등의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바로 그 국문 내용을 생생히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사건은 ‘○○사건 추안’, 또 어떤 사건은 ‘○○사건 국안’이라는 제목을 달아 고문서 형태로 묶어서 전해오던 사료입니다.


[진행자]

고문서 형태로 전해오던 사료는 요즘 시대 사람들기 보기에는 좀 어렵잖아요. 그래서 요즘 시대에 보기 편하게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변주승]

그렇습니다. 1983년에 전문가들이 이를 연대별로 정리해서, 연구자들의 편의를 위해 영인본 30책으로 출판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많은 연구자가 이를 이용하고 일반 시민들도 이 자료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한글로 번역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04년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에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번역사업에 착수해, 2014년에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Ⅱ’로서 총 90권 분량의 국역본으로 출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약 1만 2천여 명의 심문 대상자가 등장하고, 조선왕조의 사법 체계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진행자]

심문 대상자만 1만 2천여 명에 달하고, 무려 9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대단합니다. 소장님께서 연구책임자로서 번역팀을 이끌었다고 들었습니다.


[변주승]

맞습니다. 이 기록은 단순한 사법 기록을 넘어 조선사회의 사법 절차와 사람들의 삶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방대한 규모인 만큼 번역 작업에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는데요. 조선시대사, 법제사, 정치사, 한문학, 동양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10명과 연구보조원 약 20여 명이 함께 10년에 걸쳐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매달 세미나를 열어 번역 원고를 다듬는 데 10년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단 한 글자라도 번역이 잘못되면 전체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진행자]

10년 동안 공들여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하셨는데요. 당시 번역 작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변주승]

가장 어려웠던 점은 구어체 심문 내용을 기록한 이두(吏讀)의 해석이었습니다. 이두는 한자를 음차해 표현한 방식으로, 당시 심문 과정을 빠르게 속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마당 장(場)자와 쇠 금(金)자를 쓰는 '장금'(場金)이라는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요. 이 사람은 '마당쇠'로 번역해야 합니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전체 문맥을 오해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또 간간 한글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것과 달리 많은 시간을 들여 서로 교차 교열 교정하는 등 세밀한 검토가 필요했습니다.


[진행자]

한 단어의 해석을 위해서, 여러 번 비교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좀 어려웠던 부분이었군요. 소장님, 추안급국안에서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사건이 있다면, 어떤 사건인가요?


[변주승]

우리 지역 전라북도에 관련된 사건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라도 남원의 소문난 난봉꾼, 송광유의 고변 사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방탕한 사람이나 난잡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난봉꾼이라고 부르는데, 송광유는 이 표현이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방탕한 행동은 지역 사회에서 악명 높을 정도였죠.


[진행자]

우리 지역 남원에서 있었던 사건이군요. 근데 얼마나 방탄한 행동을 했으면 지역 사회에서 악명이 높았을까요? 소문난 난봉꾼 송광유는 어떤 사람입니까?


[변주승]

송광유는 당시 나이 27세로 본관은 여산 송씨(礪山宋氏)였으며, 부친 송취대(宋就大)와 천첩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孼子)였습니다. 그는 무예를 익히며 글씨를 새기거나 참빗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노비를 소유할 정도로 경제적 여유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행동이었습니다. 송광유는 가족 내부에서조차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었는데, 아버지의 첩과 형수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습니다. 또한, 금구관아 현령의 동생이 좋아하던 관비(官婢) 후양춘(後陽春)과 간통하는 등 상습적으로 간통을 저질렀습니다. 심지어 형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습니다. 인조 6년인 1628년, 송광유는 호남 지역 일부 선비들이 이씨 왕조를 무너뜨리고 허씨 진인(眞人)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한다며 고발했습니다. 여기서 허씨 진인은 조선 후기 변란 사건에서 역모 우두머리나 국왕으로 추대되는 인물을 뜻합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그 고발은 허위로 밝혀졌고, 송광유는 무고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진행자]

난봉꾼으로 살던 송광유는 대체 왜 고발을 시도한 건가요?


[변주승]

송광유의 고변 동기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개인적인 원한과 공명심이 주요 요인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과 관비 후양춘 간의 간통 사실을 공공연히 떠들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공신의 지위를 얻어 후양춘을 양인으로 해방시키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송광유는 비록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역모 고발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의 행위는 개인의 노력과 성취가 신분에 의해 제한되는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성공을 위해 무슨 짓까지 벌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인조반정과 관련된 공신들이 얽혀 있어서, 왕을 포함해 인조 시대를 주름잡던 대신들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송광유 고변 사건은 당시 무고와 억울한 희생이 빈번했던 현실을 반영하며, 이후 조선 사법제도에서 무고죄의 중요성을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방탕한 삶을 넘어서, 조선 사회의 법과 질서에 대한 깊은 교훈을 남긴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진행자]

추안급국안은 단순한 사법 기록이 아니라 사회 전반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인데요. 조선시대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건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변주승]

이 기록에서는 조선 후기 하층민의 저항과 사회적 갈등도 드러납니다. 광대 도적 장길산 사건, 홍경래 난 등 민간의 반란 시도가 포함되어 있죠. 특히 영조 4년인 1728년 무신년에, 영조를 몰아내기 위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이른바 ‘무신란’이 진압된 직후인, 1730년 경술년에 왕실을 대상으로 저주를 하려고 했던 ‘매흉’과 ‘화흉’ 사건이 발각되었습니다. 이는 궁중에서 일어난 매우 충격적이고 흥미로운 사건입니다.


[진행자]

조선시대에 왕실을 대상으로 저주라니, 소장님 말씀대로 충격적이면서 어떤 이유일까 궁금한데요. 먼저 매흉과 화흉은 무엇인가요?


[변주승]

매흉(埋兇)의 매는 묻을 매(埋)자고요, 화흉(和凶)의 화는 탈 화(和)자입니다. 매흉은 죽은 사람의 뼛가루를 특정 장소, 특히 세자궁 근처의 땅에 묻어 저주를 거는 방식입니다. 화흉은 뼛가루를 떡, 물, 죽 등에 섞어 왕실 가족, 특히 세자와 옹주에게 먹이는 독살 기도입니다.


[진행자]

매흉, 화흉, 이름처럼 흉흉한 저주인데요. 어떤 방식으로 저주가 이루어졌습니까?


[변주승]

1727년, 서울 세교에서 거름지기로 일하던 25세 김이건은 42세인 하인 거어지와 갈두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거어지는 김이건에게 담배를 빌려 피우며 은밀하게 "뼛가루를 구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김이건은 그를 연희궁 근처의 오래된 무덤으로 데려가, 죽은 사람의 팔뼈와 어린아이의 머리뼈를 파내어 건넸고, 대가로 무명과 쌀을 받았습니다. 1년 뒤, 얼굴빛이 붉은 한 여인이 김이건을 찾아와 다시 사람 뼈를 구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김이건은 대고개 근처에서 개가 뜯어먹은 시체에서 정강이뼈를 찾아내 여인에게 건넸는데, 그녀는 바로 상궁 박순정이었습니다. 박순정은 거어지의 주인이었던 이세정과 함께 저주 의식을 주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궁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저주 의식은 더욱 기이했습니다. 어느 궁녀는 "식칼로 임금이 사용하는 뒷간 근처의 흙을 파낸 뒤, 저주의 말을 외우며 볕이 들지 않는 곳에 뼈를 묻었다"고 진술했습니다.


[진행자]

정말 기이하면서 섬뜩한 저주 의식입니다. 그럼 이런 저주 의식이 실제로 효과를 발휘했습니까?


[변주승]

1728년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죽음이 바로 이런 매흉과 화흉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위생적으로 불량한 뼛가루를 장기간 섭취하면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30년에 진행된 추국 결과, 박순정과 그녀를 배후에서 조종했던 무신란 세력이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저주 의식이 단순한 미신을 넘어 권력 투쟁의 한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진행자]

저주라고 하면,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 장희빈의 저주만 생각했는데, 이런 이야기는 처음입니다. 추안급국안이 사극 소재의 보고라고 할 만하네요. 소장님, 뼛가루 이야기는 언젠가 사극으로 만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주승]

맞습니다. 조선시대 중대 범죄 사건들을 다룬 추안급국안은 그 자체로 사극의 무궁무진한 소재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매흉과 화흉 같은 이야기는, 그 독특한 배경과 긴장감으로 충분히 드라마틱한 요소를 지니고 있죠. 실제로 이런 사건들이 드라마로 재구성된다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흥미진진한 작품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추안급국안에는 이런 저주 이야기 외에도 독특하고 기묘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어, 앞으로도 다양한 창작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진행자]

추안급국안에 심문 대상자가 1만 2천여 명 등장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흥미로운 인물이 연루된 사건도 소개해주시죠?


[변주승]

추안급국안에는 매흉과 화흉 같은 저주 사건뿐만 아니라, 암행어사를 사칭한 김두행(金斗行) 같은 기묘하고 흥미로운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영조 31년인 1755년,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려던 '나주 괘서사건' 당시 의금부로 끌려온 김두행은 그중에서도 단연 독특한 사례입니다.


[진행자]

암행어사 사칭이라니, 김두행은 어떤 인물입니까?


[변주승]

김두행은 서울 아현 출신으로, 남자인데도 얼굴에 분칠하고 눈썹을 밀어 여자 행세를 하거나, 자신을 일본인으로 속이는 등 다양한 사칭 행각을 벌인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묻자 그는 횡설수설하다가 결국 "여자 노릇은 음란한 일을 꾸미기 위해 한 계략이었다"라고 실토했죠. 김두행은 성주, 대구, 고령, 합천, 현풍, 장성 등 여러 지역에서 고을 아전의 아내나 과부들과 간통했고, "다른 지역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라고 주장할 만큼 많은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일본인 행세는, 열두 살 때 일본 상인에게 납치돼 5년간 일본에서 살다 온 경험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사칭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초립을 쓰고 푸른 도포를 걸치거나, 누더기 옷을 입고 지방 유지의 집에 찾아가 자신을 암행어사로 소개하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백성의 고충을 살펴보러 왔소."

"가야산 이(李) 별장이 인삼을 만들어 판다니, 잡아야 할 터인데…."

"우리 형제 사돈들은 다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소."

"밀양 사또는 내 사촌이지."


[진행자]

본인을 암행어사라 사칭한데다 형제 친척이 다 벼슬을 하고 있다, 이렇게 위세를 떨면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겠네요.


[변주승]

그렇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며 돈을 바쳤고, 심지어 집주인의 딸을 협박해 첩으로 삼기도 했습니다. 심문 중 그는 자신이 신라 왕실의 후예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쳤습니다. 김두행 사건은 사칭과 기만의 극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사회적 혼란과 신분 제도의 허점을 반영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다는 점에서, 추안급국안은 조선시대 사회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습니다.


[진행자]

소장님 말씀처럼 조선시대 사회적 이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시대만 다를 뿐 그때나 지금이나 사건 사고는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이런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우리는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요?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역사 시간에 배웠다면,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 같거든요.


[변주승]

추안급국안이 어려운 한문과 이두로 쓰여 있어 이해하기 쉽지 않고, 2014년 번역본 90권이 출간되었지만, 아직 널리 활용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추안급국안이 재판기록이라는 점도 한 이유일 것입니다. 지금도 판결문을 보면 매우 딱딱해서 읽기 어려운 경우가 많잖아요? 재판기록이라는 것도 보존을 위해 모아놓은 기록이다 보니,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시간 순서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추안급국안만 읽어나가면, 사건을 이해하기 쉽지가 않습니다. 일단 주요 진술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거든요.


[진행자]

그런 이유가 있군요.


[변주승]

게다가 일단 잡혀가서 "니 죄를 니가 알렸다!" 하고 물어봤을 때,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바로 자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일단 거짓말부터 하죠. 또 이 시대에는 일단 때리면서 심문하는 절차가 합법이었습니다. 물론 사또가 쓸 수 있는 매와 추국청에서 쓰는 곤장이 다 규정되어 있고, 하루 때릴 수 있는 대수도 1회 30대로 제한되는 등 나름대로 규정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때리면서 조사하다 보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심문관이 원하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기록 자체가 좀 불친절 한데다가, 내용에 거짓말이 있을 수도 있으니 쉽게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전문 연구자들이 일반 시민들도 좀 쉽게 읽을 수 있게 사건을 정리해서 소개하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아마 인문클래스 다음 시간에 문경득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이어서 해주실 겁니다.


[진행자]

추안급국안에는 역사책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이런 기록을 옛날이야기로 치부할 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쉽게 읽고,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요. 그래서 번역하고, 전승하는 작업이 중요하겠죠?


[변주승]

물론입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추안급국안은 그런 한계를 넘어 조선시대 전 계층의 삶과 생활상을 생생히 담아낸 귀중한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의 속살, 그 이면까지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인 것이지요. 무엇보다 고전번역이 중요한 이유는, 100여 년 전만 하여도 대부분의 자료, 사료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전문 연구자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현실 때문입니다. 일부 전문가가 아니면 읽기 어려운 한문 자료, 고전을 아름다운 한글로 번역해서 우리 국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전번역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진행자]

소장님, 앞으로도 고전번역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변주승]

고전번역 작업을 위한 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장기 계획을 수립해서 지속적으로 번역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감미디어, 인공지능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우리 한국의 영화, 드라마 등 이른바 K-콘텐츠 소재를 다양하게 확충하고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고전국역, 한문 번역사업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영역이라 하겠습니다.


[진행자]

오늘은 조선시대 수사 재판기록, 추안급국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나봤는데요. 조선시대로 타임슬립을 한 것처럼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변주승 소장님과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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