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4(화) 책방에 가다

오늘 소개해주실 책은요?

지난 2014년 출간돼 독자들 사이에 조용한 돌풍을 일으킨 책 한 권이 있습니다. 

바로 박연준이라는 시인이 쓴 <소란>이라는 산문집인데요. 

‘산문집’은 사전적 의미로 단편 소설이나 수필, 기행문 등의 산문을 한데 모아 엮은 책을 말합니다. 

에세이집나 수필집보다는 훨씬 넓은 의미로 쓰이는데요. 

이 산문집이 한동안 절판됐다가 얼마 전 표지를 갈아입고 개정판으로 새롭게 나와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어요. 

제가 모닝쇼에서 늘 0순위로 소개하고 싶은 책이었는데 ‘책방에 가다’ 코너에 출연한지 약 6개월 만에 처음 소개하게 됐네요. 

 

책을 읽을 때 너무 좋은 구절을 만나거나 너무 와닿는 이야기를 보면, 귀퉁이를 접거나 밑줄을 긋고 싶잖아요. 

아니면 종이에 베껴 쓰거나, 폰으로 찍어놓기도 하면서 간직하고 싶고요. 

그런 좋은 구절과 와닿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이 책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다 보니 ‘시를 쓰는 다른 작가들은 어떤 시절을 건너왔고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본 책입니다.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 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도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 껴안았다”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으면서 

제 이십대의 어떤 슬픔을 생각하게 되었고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 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라는 구절에서는 ‘그래 맞아, 터지듯이 사라져버렸어.’하고 격하게 공감하게 되죠. 

하지만 박연준 시인은 자신이 느낀 슬픔이나 절망을 그냥 내팽개치지 않아요. 

이런 구절을 보면요.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서는요. 

“슬픔을 지나온 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은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이렇게 끄덕이는 거죠. 단순하게 ‘슬퍼도 나는 괜찮아’가 아니라 ‘슬프면 어어때. 

나는 그 슬픔까지 긍정해. 그 힘을 신뢰해.’ 이런 섬세한 정서가 읽는 독자들의 마음에 조용한 ‘소란’을 일으키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소란’이잖아요, 

책을 펼치면 소란의 사전적 의미 두 개가 적혀 있는데요.

‘하나는 시끄럽고 어수선함’이라는 뜻이고, 하나는 ‘암탉이 알 낳을 자리를 바로 찾아들도록 둥지에 넣어두는 달걀’이라는 뜻입니다. 

이 2가지 뜻이 이 책의 정서를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어요.

 

그리고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인은 테이블에 커피와 케이크를 놓고 막 먹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루살이 벌레가 케이크에 날아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쫓아내보려 손을 휘저었지만 쫓아지지 않아서 포크를 막 휘두르며 좀 더 공격적으로 막아보기 시작했죠.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접시를 번쩍 들어 올렸는데 접시 위에 포크 두 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 거예요. 

잠시 소란해진 거죠. 시인은 이런 오늘 일화에 ‘가벼운 소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씩 웃어본다고 해요. 

‘작은 것과 싸울 때조차 포크를 휘두르던 제 모습이 떠올라 멋쩍게 웃을 것’이라고요.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소란은 고요를 기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모든 소란은 결국 뭐라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요. 

아주 작은 에피소드이지만 우리는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아주 작은 소란으로부터 무언가 깨닫고 고요한 시간을 얻는 거죠.

  

정말 그런 촘촘하고 섬세한 시선들이 이 책을 이루고 있어요. 

시인은 그와 함께 시인의 유년시절과 성장통, 연애의 에피소드가 참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데요. 

‘당신이 아프다’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이건 산문이 아니라 시죠?(웃음) 

또, 이 책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기억이 책갈피처럼 군데군데 꽂혀 있는데요, 

이런 대목을 보면서 잠깐 마음이 멈추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자주 할퀴어놓고 돌아서서 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은요. “어느 날 책을 보다 너무 놀라 책을 떨어뜨렸다. 

책장을 넘기던 손가락에서 별안간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천천히 다시 들여다보니, 내가 아버지의 손을 빼닮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건 마치 소설 같은 구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