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마지막 주에는 시집 한 권을 소개합니다. 오늘의 시집은요?
오늘은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을 소개합니다.
1990년에 처음 나온 시집으로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외로움을 아주 절제된 언어로 다룬 작품입니다.
감정을 격하게 쏟아내기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와 그 뒤에 남은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는데요.
문장은 단순하고 평이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 한 구절에서 문득 자신의 기억을 꺼내보게 만드는 시집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연애시를 ‘삶의 비밀을 밝히려는 모든 시의 원형’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서해」라는 시를 보면 아직 서해에 가보지 않았다고 말해요.
어쩌면 사랑하는 ‘당신’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곳을 다 가버리지 않고 ‘당신이 계실 자리’를 하나쯤 남겨두겠다고 합니다.
굉장히 단순한 발상인데 애틋하죠. 이 시집에서 사랑은 함께 있는 순간뿐 아니라 누군가 떠난 뒤에도 마음속에 그 사람의 자리를 남겨두는 일로 그려집니다.
표제시도 아주 유명하죠?
네. 「그 여름의 끝」에는 여러 차례 폭풍을 겪고도 쓰러지지 않은 나무 백일홍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백일홍뿐 아니라 화자의 ‘절망’도 쓰러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보통 절망은 빨리 사라져야 좋은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이 시에서 화자는 자기 몫의 절망을 끝까지 견딥니다.
그리고 백일홍이 마당을 온통 붉게 뒤덮었을 때 비로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박준 시인은 이 시를 두고 절망은 외부의 힘에 의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절망하고 그 시간을 거친 뒤에야 사라지는 것이라고 읽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그 여름의 끝’은 한 사람이 자신의 절망을 온전히 통과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처럼 읽힙니다.
이성복 시인은 어떤 시인인가요?
1952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이성복 시인은 1977년 『문학과지성』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등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만들어온 한국 대표 시인입니다. 『그 여름의 끝』은 몇 해 전 방탄소년단 RM이 SNS에 소개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올해는 안톤 허의 번역으로 미국 크노프출판사에서 영문판이 출간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