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에 얽힌 이야기

안녕하십니까? 매일 여성시대를 애청하는 청취자 입니다. 초파리를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 집 뒤 베란다에는 복숭아가 몇 개 있습니다. 미쳐 먹지도 못하고 냉장고에도 들어가지 못하여 조금씩 상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많이 상하여 거기에는 초파리들이 많이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초파리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재학시 절 여름방학과제로 초파리 채집이라는 과제가 있었습니다. 초파리는 유전자가 우리 인간과 비슷하다하여 고등학교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곤충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과제 유인물에 적힌 것을 하나하나 다 해 가면서 초파리 채집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초파리 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교과서에 그림도 나오고 설명도 나왔지만 그림으로만 보는 초파리는 알 수가 없 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초파리 채집을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몰 라 걱정을 하였습니다. 귀여운 막내딸이 숙제 걱정을 하는 것을 본 나 의 아버지께서는 어느 날 "여기 내가 초파리를 잡아 두었다" 하시며 병을 내밀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숙제걱정을 하든 차에 아버지 께서 잡아주신 초파리가 너무나 고마워 "아버지, 고맙습니다" 인사하 고 신주단지 모시듯 잘 보관하여 여름방학이 끝나고 그것을 가지고 학 교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친구들이 잡 아온 초파리는 내가 잡아온 초파리와 영 달랐습니다. 파리의 모양이 아주 조그맣고 약간 노란 색을 띠었습니다. 나는 얼른 아버지께서 주 신 초파리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그 과제를 해오지 않은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 때 당시는 몹시 창피하였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잡아 주신 파리는 쉬파리였습니다. 집파리와는 달리 그 쉬파리는 아주 크고 힘도 세서 소의 등뒤에 앉아 피를 빨아먹는 힘이 센 파리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농부입니다. 지금은 '혼불'의 고장으로 되어 가끔씩 관 광객이 찾아오긴 하지만 그땐 너무 한적하고 가난한 농촌마을이었습니 다. 나는 그 시골마을에서 1951년에 우리 아버지 47세에 막내로 태어 나 집안식구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제가 자라고 있는 남 원시 사매면에는 중학교(사학)가 있어 중학교에는 무사히 진학을 하였 으나 고등학교 진학이 문제였습니다. 당시만 하여도 춘궁기가 있어 먹 고살기가 매우 어려워 남자들도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는 사람이 있었 고 여자가 고등학교에 진학을 한 사람은 저의 마을에 한 명도 없었습 니다. 저는 고등학교에 보내달라 울며 떼를 쓰며 아버지에게 졸라 어 렵게 고등학교를 전주로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 딸이 숙제 걱정을 하니 초파리를 쉬파리로 생각하시고 쉬파리를 잡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나는 그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몇 년 전 부터 초파리만 보면 우리 아버지가 생각이 납니다. 나를 그토록 예뻐 해 주시고 자녀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 밤낮으로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 신 우리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연세가 70이 넘으셨어 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85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1 개월 전까지만 하여도 논으로 밭으로 다니며 일을 열심히 하셨습니다. 집에 계실 때에는 늦둥이 손자 '사자소학' 및 예의 범절지도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훌륭한 인격을 갖추신 아버지 라 생각이 듭니다. 일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만 나면 책 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주무시는 퇴침 옆에는 언제나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모두 한자로 적혀 있어서 나는 읽어 볼 수가 없었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 책을 보시고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김삿갓이 삿갓을 쓰게 된 이유, 효자가 겨울에 강가에 가 서 낚시를 하여 부모님 병구완을 하는 이야기 등등 복숭아에 날아드는 초파리를 보니 불현듯 아버지가 보고싶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아버지께서 평소에 좋아하시던 술과 안주를 사 가지 고 아버지에게 다녀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