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저희는 장수에 사과 체험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장수 농업기술원에서 사과시험포를 운영하는데
해마다 사과나무를 분양한답니다.
올해 초 나무 한 그루를 분양받았는데 그새 수확철이 된 거죠.
저희가 분양받은 품종은 홍로라서 가장 빨리 수확을 한답니다.
몇 주 전부터 온 가족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사과나무 앞에 섰을 때 그 감동이란.....
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에서 첫 사과를 따서 네 등분해
온 가족이 나눠먹는데 그 맛은 정말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과를 한 입 베어먹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제게는 잊지 못할 선생님이 계시답니다.
저희 학년 학과 선생님도 아니었고 담임 선생님도 아니어서
평소에는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좀 낯선 분이셨는데,
2학년이 되면서 부쩍 부딪힐 일이 많아졌습니다.
도서실이 있는 건물에 2학년 교실들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바로 도서실 담당 선생님이셨습니다.
제가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쉬는 시간이면 도서실에 드나드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동안 쭈욱 지켜보니까 네가 제일 책임감이 강할 것 같다.
나를 좀 도와줄래?"
선택받았을 때의 기분 아시죠?
사실 가진 건 별로 없지만 나도 잘은 모르는 내 내면의 무언가를
선생님이 알아차리고 선택해주셨다고 생각하니
진짜 있는 줄도 몰랐던 책임감이 용솟음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로 저는 아침에 한 시간 일찍 등교하고
저녁에는 한 시간 늦게 하교를 하면서
선생님을 도와 도서실 정리를 했습니다.
책장 뒷면에 있는 독서 카드를 확인하고
대출자 명단을 정리하고
책을 제자리에 꽂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그 일은 정말 대단한 책임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로
어느새 제 마음은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만두신다는 거였습니다.
누구는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고도 했고
누구는 유학을 간다고도 했고 여하튼 선생님이 그만두는 건 확실해보였습니다.
저를 지탱해온 피아노줄 같은,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강한 어떤 끈이 끊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선생님이 가만히 저를 부르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도서실에 오면 서랍부터 정리해줄래?"
순간 저는 알았던 듯 합니다.
다음날 선생님은 출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요.
다음날 저는 채 동이 트기도 전에 한걸음에 달려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어두컴컴한 도서실에 불을 켜고 들어가자
책상 위에 열쇠 꾸러미가 보였습니다.
선생님을 위해 해야할 마지막 책임인 것만 같아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서랍을 여는 순간....
빠알간 사과 세 알이 눈에 띄었습니다.
쪽지라도 혹시 남기지 않았을까 서랍을 샅샅이 뒤졌지만
쪽지는 보이지 않고 빨간 사과 세 알이 전부였습니다.
사과를 손에 든 순간,
어쩌면 쪽지에 쓴 몇 마디보다 더 간절한 선생님의 당부를 알 것도 같았습니다.
"가장 책임감 있는 아이..."
사과를 보니 선생님의 당부가 떠오르네요.
저는 지금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잘 살고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