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상품권

꽤 잘 나가던 회사에 다니던 시절, 저는 이맘 때면
거래처며 지인이며 인사를 나누고 상품권이며 선물도 주고 받느라
명절을 앞둔 한달 전쯤부터 무척 바빴습니다.
그때는, 나가는 것보다 들어오는 선물이 더 많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그때는 제가 인품이 좋아서 사람들이 따르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저만의 착각이란 건 제가 회사를 그만둔지 얼마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남들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내심 스트레스도 많고 고충이 크다고 생각하던 차에
아는 선배가 견실한 중소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며 스카웃 제의를 해온 거였습니다.
이제 조금 쉬어가며 일해도 좋으리란 생각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옮겼는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연락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용준 부장님! 저 무슨 무슨 회사의 누굽니다."하고 반갑게 인사하던 사람들이
"저 이제 그 회사 부장 아닙니다. 그만두고 옮겼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멀어져간 겁니다.
돌아온 첫번째 명절에, 저는 멀어져간 사람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들어오는 선물의 종류와 양이 급격히 달라졌던 겁니다.
저는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의 직장, 저의 자리가 바뀐 것이 참 큰 의미였나 봅니다.
 
그런데 추석이 지나고 이주쯤 됐을까요,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전에 안면이 있던 사이였는데, 인연이 오래거나 깊지는 않았지만
저를 친형님처럼 모시고 싶다던 사람이었습니다.
술 마시고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연락처를 알 수 없어
전화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며 한참을 미안해하더니
저의 새 회사로 찾아온다는 거였습니다.
저도 반가운 마음에 차 한 잔 대접하겠다며 그러라고 했지요.
약속시간에 맞춰 도착한 그 친구는 여전히 친근한 웃음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옮긴 저의 직장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을 하더니
일어서는 길에 작은 봉투 하나를 내미는 거였습니다.
명절 인사가 너무 늦어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였습니다.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기어코 주머니에 넣고 돌아서더군요.
사무실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구두상품권이 들어있었습니다.
순간 제 발을 내려다 보니 하필 그날따라 가장 낡은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 구두를 보고서 선물을 내민 건 아니었겠지만
조금쯤은 처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전의 탄탄한 직장에서 더 많은 선물을 받았던 처지였다면
역시 같은 낡은 구두를 신고 구두상품권을 선물로 받았어도
그렇게 묘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을 겁니다.
 
올해 다시 명절이 다가옵니다.
예전처럼 씁쓸한 기분으로 명절을 맞이하진 않습니다.
제가 앉은 자리에 따라 떠나간 사람과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이
분명히 가려졌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무성하기만 했던 주변인 관계가 잘 정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제게 남아있는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 다시 선물을 준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