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다감] 전주MBC 2025년 04월 27일](/uploads/contents/2025/04/3365974ef461dfa99204941605043e24.jpg)
![[다정다감] 전주MBC 2025년 04월 27일](/uploads/contents/2025/04/3365974ef461dfa99204941605043e24.jpg)
역사서에 보면 ‘추국’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추국을 관장했던 추국청에서 ‘추국’하는 장면을 종종 만날 수 있는데요.
‘추국’은 역모나 대역죄를 대상으로 왕의 주관하에 이루어지는 재판을 말하고요.
왕조의 기강이나 사회 질서를 흔들 만한 중요한 사건을 대상으로 진행됐는데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조선시대 중죄인을 조사하고 판결한 내용을 모은 수사 재판 기록, 추안급국안에 담긴 사건 중에 객사의 전패를 훔치고, 왕릉에 불을 지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목서윤 아나운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문경득 HK연구교수님과 함께합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문경득]
안녕하세요.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K연구교수 문경득입니다.
[진행자]
인문 클래스 시즌3! 문경득 교수님과 함께 하는 두 번째 시간인데요. 오늘은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문경득]
일단 제목 그대로입니다. 전패를 훔쳐서 돼지우리에 버린 이야기와 왕릉에 불을 지른 사건을 준비했습니다.
[진행자]
왕릉에 불을 지른 사건은 어느 정도 짐작되는데, 전패를 훔쳐서 돼지우리에 버린 건 어떤 사건일지 짐작이 안 되는데요?
[문경득]
네. 일단 전패라는 게 좀 낯설죠? 전패는 왕을 상징하는 ‘殿’자가 새겨진 나무패로 보통 객사에 모셔놓습니다.
[진행자]
객사라고 하면, 전주 객사도 그런 곳인가요?
[문경득]
네. 일종의 영빈관 같은 곳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주 객사로 치면 전주를 방문한 관리가 머물기도 했고요. 사실 객사가 수령이 근무하는 지방 관아보다 더 격이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행사를 많이 했죠.
[진행자]
그럼 객사에 있는 전패를 훔쳐다 돼지우리에 버린 건가요? 확실히 기분 나쁠 만할 일인데, 그게 추국청에서 조사할 만한 범죄인가요?
[문경득]
지난번에 소개한 것처럼 추국청이 반역범죄를 조사하는 곳이기는 한데, 조선이 또 유교 국가였잖아요. 그래서 패륜적인 범죄, 조선시대 용어로는 강상죄에 해당하는 범죄도 수사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을 상징하는 물건을 훼손하는 일도 군주와 신하 간의 중요 윤리를 위반한 사안이라 추국청에서 다루는 사건입니다. 확실히 지금이랑 다르긴 하죠.
[진행자]
조선시대에는 이걸 강상죄라고 불렀군요. 귀에 익지 않은 단어이긴 하네요. 이런 사건은 몇 건이나 있었나요?
[문경득]
이런 사건은 전패작변이라고 하는데 [추안급국안]에는 5건 정도 있습니다.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에서 지방관을 쫓아낼 목적으로 벌인 경우입니다.
[진행자]
다섯 건이나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요. 그럼 5건을 다 소개해주실까요?
[문경득]
그러면 좋겠는데, 시간상 하나만 소개하겠습니다. 1735년, 영조 11년 충청도 충원현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충원현이 어디일까요?
[진행자]
충원현이라. 그런 지명도 있었나요? 이곳은 어디인가요?
[문경득]
지금의 충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반역죄나 강상죄가 일어나면 그 지역의 읍격을 강등하는 처벌이 이루어집니다. 지역 전체에 책임을 묻는 건데요. 지난 시간에 소개한 무신란 당시에 충주 출신 반란군들이 있어서 충주목에서 충원현으로 강등당했습니다.
[진행자]
죄의 책임을 지역에 묻고 이름이 바뀌기도 했군요. 그럼 충주 객사에서 사건이 일어났겠네요?
[문경득]
네. 그런데 진술이라는 게 좀 반복도 되고 복잡하기도 해서 제가 책에서는 이해하기 좋게 상상을 더해 소설처럼 써봤습니다. 한번 읽어주시겠어요?
[진행자]
어둠을 틈타 충주 객사의 중심 건물인 중원관中原館에 4명의 남자가 몰래숨어들었다.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최하징(崔夏徵)이 앞에서 이끌고, 이북동(李北同), 이이귀(李以貴)와 어둔(於屯)이 뒤를 따랐다. 최하징은 천천히 건물 문을 열었다. 자주 기름을 쳐 주는지 소리는 별로 나지 않았다. 넷이 조용히 들어서자 객사에 모셔진 전패가 어둠 속에 어슴푸레 보였다. 최하징은 앞장서서 들어가 전패를 모신 상 앞에 서서 모두 들어오길 기다렸다.
“이이귀, 문 닫아.”
그의 지시에 이이귀가 살살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면서 마지막에 조금 큰 소리가 나자 이이귀는 최하징의 눈치를 살폈다. 최하징은 얼굴만 찌푸리고는 다른 두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북동. 네가 올라가. 어둔 너는 상다리 잡아.”
어둔은 바로 상다리를 잡았지만, 이북동은 주춤거릴 뿐 올라가지 않았다.
“빨리!”
최하징의 목소리가 좀 더 높아졌다. 어둠 속에서도 부라린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이북동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상 위로 올라갔다. 이북동의 다리도 상다리도 부들거렸다. 최하징은 이북동의 다리를 꽉 잡아 버티며 어둔에게도 한마디 했다.
“똑바로 잡아!”
이북동은 떨리는 손으로 전패를 들고 내려와, 내팽개치듯 최하징에게 건넸다.
“옜소!”
생각보다 소리가 크게 울리자 이북동도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쉿! 조용!”
최하징은 이북동을 노려보곤, 품 안에 전패를 넣었다. 그러곤 문을 조금만 열고 밖을 살폈다. 인적이 없는 것을 보고 살살 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이이귀가 마지막에 나오며 문을 닫았는데, 세 사람은 그런 이이귀를 기다리지 않고 몸을 낮춘 채 객사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이귀는 허겁지겁 세 사람을 뒤따랐다. 그들이 야음을 틈타 순라군을 피해 향한 곳은 시장이었다. 최하징이 사창(司倉)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어디로 가는지 깨달은 이북동이 놀라 최하징의 팔을 잡았다.
“차라리 그냥 쪼개서 버립시다. 그래도 거긴 아니요!”
“어차피 이미 저지른 일이야! 이왕이면 크게 키워야지!”
최하징은 이북동의 팔을 뿌리쳤다. 목소리가 조금 커진 탓에 네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이귀하고 어둔은 숨어서 사람 오나 안 오나 망보고 있어.”
최하징은 사창 안으로 들어갔다.
“미치겠네.”
이북동도 투덜거리며 뒤따라 들어갔다. 가축의 똥 냄새가 점점 심해졌다. 바로 돼지우리였다. 돼지들은 밤이 깊어 잠들어 있었다. 최하징은 품 안의 전패를 만지작거리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뒤따라온 이북동이 다시 한번 최하징을 말렸다.
“그냥 돌려놓읍시다. 그래도 이건 아니요.”
그러나 되려 역효과였는지, 최하징은 바로 돼지우리 안으로 전패를 던져넣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돼지 한 마리가 잠에서 깨서 살짝 눈을 뜨고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자 다시 잠을 청했다.
[문경득]
역시 목서윤 아나운서님께서 읽어주시니까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읽어보시니까 좀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진행자]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문경득]
일단 객사랑 전패가 중요하다는 점은 말씀드렸죠? 왕을 상징하는 물건이라 이걸 훔치거나 훼손하는 일은 왕을 모욕하는 행동과 동급의 무거운 죄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저지른 자와 공모한 사람까지도 주범과 종범을 가리지 않고 최고 형벌인 능지처사형을 집행했습니다. 가족도 연좌될 수 있었고요. 심지어 관리 책임의 문제로 그 지방관도 파직되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마지막, 지방관 파직 때문입니다. 왕을 모욕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고을의 수령을 쫓아내기 위해서 전패작변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최하징도 그런 사례입니다.
[진행자]
자기 고을 수령을 쫓아내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요? 배보다 배꼽이 큰 거 아닌가요?
[문경득]
거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부민고소금지법이라고, 세종 때 만들어진 법인데요.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다스리는 수령의 잘못을 고소할 수 없다는 법입니다. 이게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충과 효를 중시하던 시대라서 그렇습니다. 정의보다 부모 자식간의 천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경우 패륜적이라고 했습니다. [논어]에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논어 中]
섭공(葉公, 초나라 대부)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고발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우리 무리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문경득]
이런 부모·자식 간의 논리를 지방관과 백성까지 확장해서 고소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죠. 사실 이 부분은 조선시대가 법치국가가 아니라 예치국가여서 더 그런 것도 있습니다.
[진행자]
취지는 알겠습니다만, 문제가 많은 법이네요. 조선시대 사또들이 다 청렴한 건 아니잖아요? 춘향전의 변사또만 해도 전형적인 나쁜 관리이지 않습니까?
[문경득]
그렇죠. 모든 수령이 다 청렴하고 유능할 수는 없죠. 사실 과거 공부만 몇십 년씩 한 사람들이 어떻게 행정에 능숙하겠습니까? 그래도 고발을 할 수가 없으니 향촌의 사족들이 전패작변을 일으켜서 수령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례가 몇 번 생기니까 조선 중기부터는 전패작변이 일어나도 수령을 처벌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향촌의 사족들은 전패작변을 그만두었는데 이제는 아전이나 향임, 일반 백성들이 전패작변을 일으켰습니다. 아전이나 향임은 수령을 쫓아내거나 경쟁자를 물리칠 목적으로 했고, 일반 백성들은 억울함을 표출할 수단으로 선택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억울해서 전패작변을 일으키니까 수령과 아전, 향임이 은폐하려고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파직은 안 되지만 수사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날 수도 있었으니까요.
[진행자]
정말 역사 교과서에서는 만날 수 없는 내용이라 귀가 더 솔깃하고, 흥미롭습니다. 그럼, 최하징은 왜 수령을 쫓아내려고 했나요?
[문경득]
최하징은 충원현의 창고를 담당한 아전이었는데, 수령 몰래 나락을 빼돌려 사사로이 이득을 취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개인적으로 곡식을 빌려주고 이자를 착복한 게 아닌가 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나랏돈을 빼돌려서 사채를 돌린거죠. 그런데 새로 부임한 수령에게 발각될 것 같으니까 수령을 파직시켜 돌려보내면 들키지 않을 것 같다고 해서 전패를 훔쳤다고 합니다. 그 전패작변 두 달 전부터 사내종 어둔과 이이귀를 시켰는데 다들 죽을죄라는 건 알아서 두들겨 패니까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최하징이 어머니를 닦달하니 어쩔 수 없이 돌아와서 가담했다고 합니다. 이북동은 무기고를 담당하는 아전이었는데 그날 숙직이었습니다. 최하징이 몰래 찾아가서 돈을 주고 끌어들였다고 진술에 나와 있습니다.
[진행자]
하지만 결국 추국청의 조사를 받은 걸 보니, 수령도 안 쫓겨나고 본인이 저지른 짓은 들통났나 봅니다.
[문경득]
네. 서울에서도 경차관을 보내서 조사하고 충청도에서도 충청감사와 충주영장이 조사하다 보니 비리가 드러났습니다. 즉, 범행동기가 딱 드러나는 바람에 결국 붙잡혀서 조사받다가 처형되고 말았죠.
[진행자]
객사의 전패를 훔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이제 다음 이야기만나 볼 텐데요. 왕릉 방화인가요? 왕릉에 불을 질렀으니 처벌이 세긴 할 것 같은데, 왜 불을 질렀을까요? 전패작변이랑 비슷한 이유일까요?
[문경득]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비슷합니다. 다만 이번에는 수령은 아니고 파주에 있는 장릉의 능지기들과 불화가 문제였습니다. 파주장릉은 인조와 인조의 왕비가 합장된 왕릉입니다. 아무튼 왕릉에 불이 나자 바로 형조에서 조사를 진행했고 밤늦게 의금부에서 추국청이 열렸습니다. 이날 조사받은 수복과 능군은 모두 최석산이 범인이라고 지목했습니다. 조사해보니 그 이전 해에 최석산이 왕릉의 나무를 훔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나무를 가지고 집도 짓고 땔깜도 하다 보니 굵고 좋은 나무를 구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최석산은 목수로 공사를 해야 하는데 나무를 구할 길이 없자 능지기들이 관리하는 왕릉의 나무를 베어간 거죠. 그 상황도 좀 웃긴데, 왕릉의 소나무를 자르면서도 당당하게 ‘이 나무는 잘라내도 괜찮다!’고 하면서 나무를 잘라 가져왔습니다. 그랬다가 이게 들통나서 주범인 최석산은 풍천으로 유배를 가고 다른 사람들은 매 15대를 맞고 풀려났습니다.
[진행자]
나무가 없어서 왕릉의 소나무를 자른다고요?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문경득]
사람들이 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왜 있겠습니다. 그리고 최석산이 그런 것도 나름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목수였는데 심씨라는 양반집의 계집종과 결혼한 비부(婢夫)였습니다. 즉 평민이지만 같은 평민이랑 결혼하지 못하고 양반집 계집종과 결혼한 건데요. 조선시대 법률이 보통 신분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서 최석산의 자식들은 노비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최석산이 평민이지만 반쯤은 사내종 취급을 받았을 겁니다. 아무튼 그 상전인 심씨 양반이 갑질하는 상사나 못된 군대 선임처럼 ‘어떻게든 구해와!’라고 하는데 구할 길이 없으니까 최석산이 궁리 끝에 왕릉에서 소나무를 베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조사 결과 그 양반이 왕릉의 나무를 베어오라거나 왕릉에 불을 지르라거나 하는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왕릉의 재실에 와서 버럭버럭 고함을 지른 정황이 보고되었지요. 즉, 비부의 뒷배가 되어 최석산이 제멋대로 굴도록 했다는 이유로 심씨 양반도 처벌을 받게 됩니다.
[진행자]
어쨌든 최석산이 왕릉의 소나무를 훔친 게 들통나서 처벌을 받은 거네요. 그런데 왕릉에 불을 질렀다고 하셨잖아요? 불은 왜 지른건가요?
[문경득]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는 않죠. 왕릉을 지키는 수릉군 입장에서는 도난 사건에 대해 적법하게 대응한 거니까요. 하지만 최석산은 수릉군에게 원한을 품었습니다. 게다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15대만 맞고 풀려났다고 했잖아요? 최석산은 그것도 “너희들은 상전댁의 종이기 때문에 모면하고, 나는 계집종의 남편이기 때문에 홀로 죽을 지경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배지에서 도망쳐서 같이 나무를 훔쳤던 사람들을 협박해서 데리고 가서 왕릉에 불을 질렀습니다. 진술을 종합해보면 장릉 북쪽 작은 길로 숨어가서 정자각 뒤편 서쪽에서 마른 낙엽을 모으고 부시를 두드려 화약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에 이걸로 낙엽에 불을 붙였다고 합니다. 하필 거센 바람이 불던 날이라 불이 바로 피어오르자, 같이 간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도망쳤고, 최석산은 유배지인 풍천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마치 풍천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꾸미려고 말이죠.
[진행자]
그런 걸로 속지는 않겠죠. 결국, 조사받아서 기록에 남았으니까요. 그런데 단순히 원한 때문에 불을 지르다니, 참 어리석은 사람이었네요.
[문경득]
제가 역사학을 전공하긴 했는데, 과거에 대해 알면 알수록 참 낯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그래도 의미를 부여하자면 일종의 상징 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비유하자면, 갑오개혁 당시에 단발령이 있었고 이걸 반대하면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잖아요. 개혁이 중요하지 상투가 중요한가? 할 수 있는데요, 당시 그 개혁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상태에서 구성된 친일내각이 쏟아내던 개혁들입니다. 그래서 그 지시에 따라 상투를 자르는 것은 일본에 굴복하고 순응한다는 뜻이기도 했기에 저항했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그때의 상투는 단순히 그냥 상투를 자르는 의미는 아닌 거죠.
[문경득]
맞습니다. 사실 머리카락이 길면 독재정권 시절에는 장발이라고 단속하면서 강제로 깎기도 했는데, 또 반대로 삭발투쟁 같은 것도 있잖아요? 여기서는 머리카락이 하나의 상징이 되는 거죠. 전패나 왕릉 또한 권위의 상징이고, 이걸 훼손하면서 나름의 불만을 표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개인의 욕심이나 못된 성격이 반영된 부분도 있는데, 저는 이런 부분도 어느 정도는 사회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하징의 경우에는 아전에게 제대로 녹봉도 주지 않아서 어쩌다보니 나라의 곡식을 빼돌린 거고, 최석산도 땅도 없고, 가진 재주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양반집 계집종과 결혼했으니까요. 옛날에 맹자도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먹고 살 만한 뒤에야 윤리와 도덕을 지킬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온전히 최하징과 최석산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겠더라고요.
[진행자]
방금 말씀해주신 맹자의 말씀은 지금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욕심도 있지만, 사회의 영향도 있다는 말씀에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상징투쟁, 항산항심. 역사 속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적용되고, 돌아보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교수님, 이렇게 인문클래스 두 시간 함께 했는데요.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문경득]
지난 시간과 오늘 한 내용은 모두 [왕의 수명을 줄여라]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저랑 다른 선생님 두 분과 함께 쓴 책인데요. 너무 긴 사건은 다루기 어려워서 짧은 사건 중에 골라서 읽기 쉽게 쓴 책입니다. 시간 관계상 못다한 이야기는 책을 통해서 만나보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지역의 인문학을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한국고전학연구소 문경득 HK연구교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