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Air
[취재수첩] 연극이 끝나고 난 뒤
2026-01-10 173
조수영기자
  jaws0@naver.com

[전주MBC 자료]

무대 위의 화려한 조명이 꺼지면, 배우는 분장을 지우고 관객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박수와 환호가 사라진 뒤에야, 방금까지 펼쳐졌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곱씹게 됩니다.


5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노랫말이, 얼마 전 확정된 한 판결의 의미를 떠올리게 합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앉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 샤프(SHARP), 연극이 끝난 후 中(1980)


‘여론조작 사건’이라는 이름의 연극이 펼쳐진 무대는 전북 군산시였습니다. 재선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을 둘러싸고 벌어진 불법 행위는, 지난 8일 대법원 판결로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국회의원(군산·김제·부안갑)은 연극의 주인공인듯 하지만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무대 뒤에서 ‘거짓 응답’이라는 대본을 써 내려가며 장면을 움직인 선거 관계자들이 있었습니다. 재판부는 이들의 행위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 범죄로 판단했습니다.


■ 1막: 연극의 시작


판결문은 우선 이들의 범죄가 단기간에 우발적으로 이뤄진 일탈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지난 2020년 치러진 제21대 총선 무렵,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이 만들어졌습니다. ‘여론 수렴의 장’이라기보다 ‘여론 조작의 지휘소’였습니다. 단톡방에서 오간 대화들은 작전 명령과 다르지 않습니다.


가령 여론조사 기관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하면, 무대 뒤 스태프들은 일제히 움직였습니다. 지난 2020년 2월 5일 아침 9시 5분 19초에 아래와 같은 매뉴얼이 단톡방에 올라왔습니다.


※ 신영대 캠프 여론조사 대응지침

1. 5일~6일 여론조사가 진행됩니다. 긴장감을 늦추지 마시고 대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주변 지인에게 문자와 전화로 여론조사 대기 홍보합니다.

3. 휴대폰은 무기입니다. 화장실을 갈 때도 꼭 휴대합니다.

4. 여론조사는 서울(02)지역번호로 옵니다. 발신 번호 확인 후 녹음하시고 이곳 단톡방에 공유해주세요.

5. 후보인지도, 경쟁력 지지정당 등으로 여론조사 진행됩니다.

6. 바쁜 와중에 오프라인 내방보다 빠른 톡 전달이 중요합니다.

7. 최초 연령대 등 파악 후 진행됩니다.

본인의 연령대가 마감되었다는 안내를 들으시면 바로 내용전달 부탁드립니다.


(출처: 서울북부지법 판결문 29쪽)


실시간으로 올라온 이 공지에 따라, 응답자들은 자신을 버렸습니다. 여론조사 응답으로 20대 여성이 되기도, 또 필요하다고 하면 60대 여성으로 둔갑했습니다. 거짓의 가면을 쓴 ‘변검’을 방불케 합니다.


지난 2020년 2월 21일 밤 9시 36분 37초, 신영대 의원은 단체 대화방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꼭 이기겠습니다. 사랑합니다."(출처: 서울북부지법 1심 판결문 29쪽)


■ 2막: 기계가 삼킨 민심


재작년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연극은 더욱 대담해졌습니다. 당시 신영대 의원의 경선 상대는 역시 현역이던 김의겸 의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격차가 엎치락뒤치락하자, 이번엔 아예 ‘유령 관객’을 동원합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중고 휴대전화 240대를 매입했습니다. 이 기계들은 유권자의 목소리를 담는 도구가 아닙니다. "신영대"라는 이름을 반복 재생하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개통된 91대의 휴대전화로 79차례 중복 응답이 이뤄졌습니다. '신영대 의원을 지지한다'는 하나의 응답을 위해, 한 사람이 연령과 성별을 자유자재로 바꿔가며 여론조사 시스템을 농락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연극으로 비유하자면, 빈 객석을 두고 박수 소리만 틀어놓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사이 군산 시민의 진짜 목소리는 조용히 지워졌습니다.


■ 3막: 1,500만 원


무대 뒤에서는 '돈'도 오갔습니다. 내부적으로 경선 운동 관계자에게 차명 휴대전화 100대와 함께 건네진 돈은 1,500만 원.


정책과 비전으로 경쟁해야 할 무대에서, 돈과 기계가 유권자의 눈을 가렸습니다. 판결문에 적힌 대화들은 이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여론조사를 무력화하려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여론조사에서 목표 응답 숫자가 채워진 지역·연령·성별을 피해 다른 신분으로 응답하라는 지시는, 선거를 공정한 경쟁이 아닌 ‘사기극’에 가깝게 전락시켰습니다.


판결문을 보면 신영대 의원은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총 4개의 단체 대화방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판결문 속 범죄 일람표 가운데 지난 2023년 12월에 있었던 '총선승리 핵심리더 모임'의 일부 대화 내용입니다.



A: 저 받았어요^^ 20대 수송동 여자로 했습니다^^


B: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신영대 의원: 고맙습니다


(출처: 서울북부지법 판결문 26쪽)


■ 4막: 정적만 남았다


대법원이 판결을 확정하며 두 차례 총선에 걸친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결국 꼬리를 밟힌 채 단죄됐습니다. 신 의원은 그 결과로 의원직을 잃었습니다. 피고인 신분은 아니었지만, 공직선거법에 따라 징역형을 선고 받은 선거사무장과 연대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군산 시민에게 돌아왔습니다. 당선무효로 치러지는 재보궐선거는, 그 누구도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신 의원은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무대 위의 커튼을 붙잡고 있는 배우처럼 보입니다. 윤석열 정권 검찰 수사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결문에 기록된 증거들, 수십대의 차명 휴대전화, 분주하게 지시가 오간 단톡방 메시지, 현금 뭉치는 '박해의 기록'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 에필로그: 조명이 꺼진 무대


호남에서는 ‘민주당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말이 관용어처럼 쓰입니다. 본선거의 긴장감이 낮은 대신, 경선이 사실상 승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당내 경선 여론조사를 조작하는 행위는, 경쟁자를 속이는 차원을 넘어 주권자인 시민의 선택을 가로채는 일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무대에는 정적만 남습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잃은 군산 역시 이제 박수도, 조명도 사라진 무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운 이 ‘조작의 연대기’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는, 결국 관객이자 유권자인 시민들 몫으로 남았습니다.


노랫말은 묻습니다. 연극이 끝난 뒤 조명이 꺼진 무대를 바라본 적이 있느냐고. 대법원 판결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어둠이 내려앉은 객석에서 관객들이 권력에 눈먼 자들의 흔적을 직시하며 책임을 묻고 교훈을 남기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