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다감] 전주MBC 2025년 05월 18일](/uploads/contents/2025/05/cd83c95d34a50f9e6c4ca816fa9711f6.jpg)
![[다정다감] 전주MBC 2025년 05월 18일](/uploads/contents/2025/05/cd83c95d34a50f9e6c4ca816fa9711f6.jpg)
과거 인류가 남긴 물질적 잔존물, 과거 문명의 흔적을 유적이라고 하는데요.
유적은 고대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고대 유적이라는 타임캡슐을 통해 우리는 사라진 과거의 시간과 만나고, 유적을 연결 고리로 과거와 현재를 탐구할 수 있는데요.
우리 지역, 흙 속의 숨겨진 유적을 통해 그 시대로 타임슬립 해볼까요?
인문 클래스 시즌3! ‘흙 속에 담긴 지역 이야기Ⅰ’ 오늘은 전주 송천동 유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이충훈 아나운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상균 교수님과 함께합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상균]
안녕하세요.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상균 교수입니다.
[진행자]
인문 클래스 시즌3, 이상균 교수님과 함께하는 첫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어떤 이야기 나눠볼까요?
[이상균]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에 있는 송천동 유적, 원삼국시대의 마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진행자]
송천동에 유적 있었군요. 흥미로운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원삼국시대는 언제를 말합니까?
[이상균]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는 고대국가로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이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경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는 한국사에서 삼한시대(三韓時代)로 부르기도 하지만, 삼한은 남한지역에 국한하는 구분으로 북한지역까지 아우르는 시대구분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고학에서는 삼국시대의 원초기라는 의미에서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지역적으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속하는 남한지역은 물론이고, 낙랑(樂浪), 대방(帶方), 동예(東濊), 옥저(沃沮)가 속한 북한지역과 고구려(高句麗), 부여(夫餘)가 속한 중국 동북지방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원삼국시대, 마한은 어떠한 나라인가요?
[이상균]
마한은 기원전 1세기경 [삼국지(三國志)], [진서(晋書)] 동이전(東夷傳)에 그 존재가 알려져 있습니다. 54개 소국 중에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진왕(辰王)으로 추대되어 삼한 중에 두각을 나타냈는데요. 2세기에 들어서는 한강 하류역에 위치한 백제가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소국들에는 각 나라의 대표성을 가진 군장(君長)이 있었죠. 종교적으로는 천군(天君)으로 불리는 제사장이 있었고, 소도(蘇塗)라 부르는 제사 지역을 관할 한 이른바, 제정분리(祭政分離)가 이루어진 사회였습니다. 생업은 농경과 잠상(蠶桑)이 주류를 이루고, 5월과 10월에는 군중이 모여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진행자]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마한 하면 철기문화가 떠오르거든요.
[이상균]
맞습니다. 마한은 백제가 국가체제를 갖추기 이전의 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까지 금강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전개됐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토착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발전했고, 철기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에 중국측 한나라의 철기문화가 수용되었고, 서북한지역에서 마한, 진한, 변한보다 먼저 철기문화를 수용했습니다. 특히 마한 목지국의 진왕은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철기문화를 받아들였고, 공주 봉안리,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완주의 갈동, 신풍, 상운리, 장수 남양리 유적 등에서 보이듯이 초기의 철기문화를 발전시켜 갔습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철기문화의 중심지였던 마한의 마을 유적이 송천동에서 발견됐다는 건데요. 유적이 발견된 곳이 송천동 어디쯤인가요?
[이상균]
송천동 유적은 송천동 농수산물 시장과 인접한 해발 20~25m정도의 완만한 구릉지역에 위치합니다. 전주시 토지구획 정리사업에 의해 조사가 진행됐고, 지금은 송천동 자이 아파트와 도로가 들어서 있습니다.
[진행자]
송천동 유적 발굴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이상균]
송천동 유적은 2001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실시됐고, 당시 무문토기와 연질, 경질토기, 석제품 등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이후에 이르는 유물들이 다수 수습된 바 있습니다. 지표조사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주대학교 박물관이 주관해서 전북대학교 박물관과 공동으로 2002년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진행자]
교수님, 유적이 발견된 곳을 보면 주변에서 유물이 발견되곤 하던데요. 송천동 유적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상균]
잘 알고 계시네요. 전주 천변의 낮은 구릉에 위치한 본 유적의 주변에는 많은 유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기존에 송천동의 전주천에 임한 구릉 남사면에서는 2기의 석관묘가 조사됐고요, 송천동 와룡리 전주 천변 구릉의 동남사면에서 후기구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석기가 발견돼서 전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구석기 유적의 존재가 확인됐습니다. 또 송천동 2가 일원의 낮은 구릉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13기, 조선 시대의 분묘 32기가 조사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그럼 송천동 유적지에서 어떤 유적이 발견됐는지도 궁금합니다.
[이상균]
마한의 주거지가 다량으로 발견됐는데요. 조사구역의 구릉 정상 부위는 근래에 이르러 가축농장과 수목농장 등이 자리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많은 부분이 교란돼서 유구 확인에 장애가 됐습니다. 또 밭 경작으로 많은 부분이 삭평되기도 했습니다. 송천동 유적에서는 전주대학교 구역의 A지구에서 원삼국시대 주거지 15기, 수혈유구 14기, 구상유구 1기, 토기공방 1기, 부정형유구 1기, 토광묘 5기가 조사되었고, 전북대학교 구역의 B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1기, 원삼국시대 주거지 51기, 고상건물지 1기, 수혈유구 9기, 구상유구 4기, 토기요지 1기, 토광묘 6기 등이 조사됐습니다.
[진행자]
교수님께서 발견된 유적을 말씀해 주셨는데, 청취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용어 해석이 필요합니다. 수혈유구, 구상유구, 부정형유구는 무엇을 말하는지, 다른 유적 용어도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면 어떨까요?
[이상균]
고고학의 용어는 한자어로 쓰느냐 한글로 풀어 쓰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오늘은 한자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수혈유구는 구덩이, 구상유구는 도랑, 부정형유구는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구덩이를 의미합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씀드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아쉽네요.
[진행자]
청취자분들이 방송을 듣고, 관련 용어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송천동 유적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발견된 유적을 통해서 마한 원삼국시대의 주거 환경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네요.
[이상균]
맞습니다. 송천동 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주거의 형태, 규모, 배치, 유물출토의 양상 등에서 마을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을의 구조는 대형 창고나 공공장소, 광장, 대형주거지역, 소형주거지역, 저장수혈, 고상가옥, 토기요지, 토기공방 등이 조사되어 원삼국시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행자]
유적을 통해 그 시대를 살펴보는 건, 마치 그때로 타임슬립 하는 기분인데요. 마한 주거지는 어떤 형태인지 궁금합니다.
[이상균]
A지구를 중심으로 보면, 조사된 주거지의 형태는 장방형 3기와 방형 12기입니다. 방형이라고 하는것은 사각형을 의미합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호 주거지(9×5.7m), 가장 작은 것은 13호 주거지(3×2.4m)입니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에 대형에 가까운 주거지가 존재하고 있고, 경사진 북사면에 위치한 주거지들은 중․소형 주거지입니다. 일반적으로 전북지역의 마한 주거지는 방형과 원형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송천동 유적에서는 방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그 밖에 주거 형태는 어떤 모습인지 설명해 주시죠?
[이상균]
부뚜막은 한쪽 벽면의 중앙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강돌이나 토기가 화덕자리 시설의 일부로 사용했다는 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기둥구멍은 4주 기둥체재가 기본을 이루고 있고, 마한지역의 방형 혹은 장방형 주거지의 기본 구조라 할 수 있다. 벽가에는 배수가 되도록 도랑이 있는 벽구시설과 배수시설이 존재합니다.
[진행자]
요즘 주거지는 보통 방이 서너 개는 되잖아요. 마한 주거지에는 방이 몇 개 있었을까요?
[이상균]
방을 나누는 칸막이 시설은 3호, 4호 주거지에서 그 양상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3호 주거지는 남측에 2개소가 나란히 있고요, 4호 주거지의 경우는 거의 중앙 부분에 장타원형의 시설이 나란히 2개소에 있어, 4주 기둥체재의 주거공간이 양분되는 형태입니다. 이 경우 부뚜막 시설이 있는 북측은 여성 전용, 남측은 남성 전용의 공간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
주거지에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되겠군요. 이곳에 출토된 유물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상균]
송천동 유적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각종 토기를 비롯해 화살촉, 가락바퀴(방추차), 갈판, 돌도끼(석부) 등입니다. 토기의 종류는 바리(발형토기), 계란모양토기(장란형토기), 짧은목항아리(단경호), 곧은입항아리(직구호), 겹아가리항아리(이중구연호), 손잡이달린항아리(파수부호), 곧은입항아리(직구호), 굽달린항아리(대부호), 넓은입작은단지(광구소호), 소뿔모양토기(우각형토기), 옹기형토기, 시루, 새모양토기(조형토기), 제기형토기(두형토기), 뚜껑 등이 출토됐습니다. 특히 9호 주거지에서는 말씀드린 토기의 대부분이 출토됐는데요. 15개체분이 넘는 각종 토기가 주거지의 동쪽벽 전체에 열 지어 있는 양상이 확인됐습니다. 마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모든 토기 종류가 다 출토되었고, 이러한 토기는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그릇 대부분이 이미 이 시기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행자]
얼핏 들어도 토기 종류가 참 많습니다.
[이상균]
그렇습니다. 이 주거지에서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에서 사용하는 토기의 전 세트가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거의 중앙에는 저장 용기로 사용한 옹기형토기가 출토됐습니다. 토기들이 벽면에 줄지어 있는 것을 보면 부엌의 선반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토기 외의 유물은 가락바퀴(방추차), 화살촉, 소형돌도끼(소형석부), 갈판 등이 출토됐습니다. 토기에 비해 출토량은 지극히 적은 편입니다.
[진행자]
교수님, 화살촉은 알겠는데요. 방추차, 갈판은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시죠?
[이상균]
방추차는 실을 감는 나무나 쇠가락에 끼워 회전을 돕는 바퀴입니다. 갈판은 갈돌과 같이 사용하며, 나무열매나 곡물의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 용도로 쓰이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군요. 그럼 발견된 유물 중에 특이한 유물도 있습니까?
[이상균]
삼한에서는 농경을 위주로 한 농경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새를 만들어 공헌물로 사용했는데요. 문헌에 나오는 소도(蘇塗)에서 새의 신앙과 관련된 솟대의 유래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또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는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사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의미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도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렇다면, 새 모양의 무언가가 발견된 건가요?
[이상균]
그렇습니다. 4호 주거지에서는 일반적으로 무덤에서 보이는 새모양토기(조형토기)가 드물게 주거 내에서 출토됐습니다. 주거 내에서 제사를 지낸 흔적으로 판단됩니다. 새모양토기는 문헌에서도 관련된 기록이 보이듯이 장례와 관련한 의식에 사용됐습니다. 새모양토기는 영혼 불멸 사상에 의한 피장자의 승천과 관련해서 장례 후에 동시에 안치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사장이나 수장급의 중요 인물이 소지해서 제사를 집행할 때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진행자]
4호 주거지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이상균]
그렇죠. 4호 주거지에서는 새모양토기(조형토기) 외에도 제기로 알려진 제기형토기(두형토기)가 출토되어 4호 주거지의 거주자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새모양토기와 제기형토기는 칸막이 시설의 동남쪽에 발견돼서 남성이 거주하는 구역에 해당하고, 제사의 주체는 남성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발견된 유물을 통해서 주거지에 거주한 사람의 신분이나 역할을 유추해 볼 수 있군요. 또 원삼국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흔적은 어떤 게 있습니까?
[이상균]
원삼국시대에는 곡물의 증가와 함께 새로운 식량의 요리가 이루어졌고, 이에 더해 부뚜막이 출현하면서 취사도구도 개량됐습니다. 마한의 주거지에는 벽가에 부뚜막이 있고, 부뚜막 아래에는 점토로 만든 아궁이 틀을 제작했습니다.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서는 토기로 만든 연통이 사용됐고요. 부뚜막 주변에서는 취사 용기로 사용된 시루, 계란모양토기(장란형토기), 바리(발형토기)가 출토되고 있고, 토기를 엎어서 솥받침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원삼국시대에도 부뚜막시설이 존재했군요. 앞서 취사도구도 개량됐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이상균]
조리기로는 시루, 옹기형토기가 주로 사용됐습니다. 부뚜막의 등장으로 시루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비로소, 찜을 해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거죠. 시루는 기원전 1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기원후 3세기에 이르면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특징을 보입니다. 시루는 많은 유적에서 일반적으로 출토되고 있고, 항아리나 옹기와 세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을 담아 수증기를 내는 토기는 부뚜막에 걸치고, 그 위에 시루를 얹어서 사용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식기로는 바리, 제기형토기가 사용됐습니다. 또 목기로는 사각 용기, 오절판, 주걱, 국자 등이 출토됐습니다.
[진행자]
원삼국시대의 취사도구를 살펴봤고요. 그때는 무엇을 먹었을지 궁금합니다.
[이상균]
8호 주거지에서는 탄화미, 11호 주거지에서는 탄화미와 다량의 콩류, 12호 주거지에서는 탄화미와 콩류가 부뚜막을 중심으로 다량으로 검출됐습니다. 종자분석을 통해 본 탄화미는 국내 벼 품종에 근접한 쟈포니카, 콩은 야생콩으로 판명됐고요. 이 외에도 근처의 완주 용흥리 유적에서는 탄화미, 밀, 팥, 조, 불에 탄 복숭아씨가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주거지에서 곡물이 출토됐군요. 원삼국시대 유적을 통해 마한의 생활상을 알아보고 있는데요. 그밖에 또 어떤 것들이 발견됐나요?
[이상균]
토기공방이 발견됐습니다. 토기공방의 평면은 부정방형으로 규모는 장축 2.1m, 단축 2m입니다. 공방 내부의 서남 모서리 부분에서 완형의 소형토기 1점이 출토됐고요. 토기 제작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박자가 2점 출토됐습니다. 박자는 토기를 만들 때 바탕흙을 두드려 단단하게 하는 데 쓰던 연장입니다. 중앙부위에서는 토기 제작의 원료로 보이는 회갈색의 점토 덩어리 2개소에서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발견된 것이 토기요지입니다. 토기요지는 토기공방과 인접해 있고, 요지의 규모는 길이 3.9m, 폭1m, 아궁이부의 폭0.4m 정도입니다. 잔존하는 바닥에는 소토와 목탄이 깔려있는 상태여서 요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내부에서는 연질토기편 소량이 수습됐습니다. 송천동 유적에서는 드물게 토기공방이 토기요지와 세트로 조사돼서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토기의 수급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
토기 공방과 가마가 세트로 발견된 거군요. 교수님 궁금한 게, 이런 유적을 통해 거주연대가 언제였는지 특정할 수 있나요?
[이상균]
그렇습니다. 고고학의 연대측정에 있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방사성탄소연대법(放射性炭素年代法)입니다. 이 방법은 1950년대 미국 시카고대학의 리비(Libby,W.F) 교수에 의해서 개발됐는데요. 적용되는 유물은 유적에서 출토된 목탄, 통나무배, 조개껍질, 식물유존체, 동물유존체 등의 유기물질입니다. 이 방법은 후기구석기 이래, 고고학 편년의 절대연대 측정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그럼 송천동 유적의 경우는 어떤 방식으로 연대를 측정했나요?
[이상균]
A지구에서는 목탄 시료를 4개소에서 채취해서 방사성탄소연대법으로 연대 측정을 진행했습니다. 중심연대는 1호 주거지 A.D. 150년, 8호 주거지 A.D. 320년, 9호 주거지 A.D. 270~370년, 토기공방 A.D. 260년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송천동 유적의 연대폭은 A.D. 150-370년으로 약 220년간 지속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진행자]
이런 방식으로 거주연대를 알 수 있다니, 신기합니다. 송천동 유적을 쭉 살펴봤는데요. 오늘 소개해주신 송천동 유적을 쭉 정리해볼까요?
[이상균]
원삼국시대 마한 주거지는 A지구에서 15기, B지구에서 51기, 도합 66기의 주거지가 조사됐습니다. 당시 마을의 인구를 추정해 보면, 200여 명이 넘게 거주한 대규모 마을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주거지는 구릉 정상부와 남사면, 북사면에 분포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장방형 혹은 방형의 형태에 도랑이 있는 벽구, 배수시설, 부뚜막 등이 확인됐습니다. 특히 9호 주거지에서는 15개체분이 넘는 각종 토기가 군집된 상태로 출토돼서 원삼국시대에 사용하는 토기의 종류와 용도의 파악이 가능합니다. 또 8호, 11호, 12호 주거지 내에서는 탄화미, 콩류의 곡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식생활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드물게 토기공방과 토기 가마가 조사되어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토기의 수급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진행자]
원삼국시대 마한의 역사와 문화,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유적이 발견됐는데요. 교수님, 송천동 유적이 전하는 메시지와 의의는 무엇일까요?
[이상균]
송천동 유적에서는 마한의 주거 형태, 규모, 배치, 유물출토의 양상 등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마을을 완전하게 조사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전주지역 마한의 생활상과 문화상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학술적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문헌상에 마한은 목지국을 포함한 54개 소국으로 이루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송천동 유적은 전주지역이 마한의 소국(불사분야국)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마한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송천동 유적, 어떻게 보존되고 있습니까?
[이상균]
본 유적은 일부분이 송천동 1호 어린이공원으로 조성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본래는 없어질 위기에 있었는데, 마한의 마을 유적이 온전히 조사되어 학술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평가됐고요. 그래서 공원으로 보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유적공원으로는 전주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곳이고, 현재는 역사 견학의 장, 교육의 장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진행자]
원삼국시대, 마한의 유적이 있는 송천동 유적을 보러 공원에 꼭 한 번 가봐야겠습니다. 끝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상균]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공원이 조성된 지 20여 년이 넘어 시설이 낡아 있고, 재정비가 필요합니다. 공원의 명칭도 전주 송천동 유적공원으로 명명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진행자]
교수님이 말씀처럼 송천동 유적이 발견된 곳이니 공원 이름도 그에 걸맞게 불리고, 유적공원이 잘 관리 되면 좋겠습니다.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온다라인문학센터와 함께 우리 주변의 살아있는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즐기는 인문 클래스 시즌3, 오늘은 전주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이상균 교수님과 함께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