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MBC 자료사진]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일자리’에서 시작합니다. 25년간 한 제지 공장에서 근무해 온 주인공 만수(이병헌)가 하루아침에 해고되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안한데, 당신이 사라져야 내가 살아"
만수는 경쟁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지워가기로 합니다. 가족, 그리고 아버지가 물려준 집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릇된 자기합리화입니다.
■ 지방 소멸이라는 '모가지'
전북특별자치도가 써 내려가고 있는 이야기의 얼개도 비슷합니다. 각종 경제와 인구 지표는 바닥을 헤매고, 소멸의 그림자가 눈앞으로 다가온 현실. 그 위태로운 장면은 영화 속 또 다른 대사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합니다.
“너, 모가지야.”
이 이야기의 감독은 김관영 도지사입니다. 그가 생존을 위해 꺼내든 카드는 '전주하계올림픽'이었습니다. 다만 혼자 힘만으론 역부족이니 여러 지역들이 협력하는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광주·전남, 충청, 대구 등을 아우르는 이른바 '지방 도시 연대 올림픽'입니다. 전북이 살기 위해 사라져줘야 할 경쟁자는 서울이었습니다. 만수의 선택과 닮았습니다.
지난 2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시작을 열었습니다. 올림픽에 도전할 국내 후보도시로 서울을 밀어내고 전북이 선정된 것입니다. ‘전북판 생존 서사’가 궤도에 오른 순간, 김관영 지사의 얼굴에는 결의에 벅찬 기색이 엿보였습니다. 이후 전북도청은 소멸 위기를 방어할 전선(戰線)이 됐고, 야심 차게 꾸려진 ‘올림픽 유치 추진단’은 병참기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이 서사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겐 아직 가시지 않는 몇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정말 이게 전북을 살리는 길일까?'
'교통·경기장·숙박시설은 어떻게?'
'가능하긴 한가?'
■ 도전인가, 도박인가?
김관영 전북도정에게 현실적인 제약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실 쉽게 의문을 제기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지역에선 더더욱 그랬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회심의 카드를 꺼낸 김관영 지사부터가 너무도 간절해 보였습니다.
그 절박함 앞에, 의문은 곧 배신처럼 여겨졌습니다. "1%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해야 한다"라며 김 지사가 쳐놓은 프레임에 모든 비관론과 반대 논리는 고개를 들다가도 힘을 잃곤 했습니다. 올림픽을 유치하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따라올 것이라는 기대가 퍼졌고, 그 명분 앞에서 ‘올림픽이 아니면 어떤 수가 있느냐’는 반문이 반복됐습니다. 언론도 그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더불어민주당 윤준병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글에 전북도가 뒤집어졌습니다. 그는 전북도의 올림픽 유치 계획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기준에 부적격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지역구가 정읍·고창으로, 줄곧 전북도와 보조를 맞춰 온 국회의원이 꺼낸 폭탄선언이라 충격파가 컸습니다.
핵심 논란은 ‘경기장 배치의 압축성’이었습니다. IOC는 대회 효율성과 선수들의 올림픽 경험을 위해 이동 거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지만, 전북이 내세운 ‘지방 도시 연대 올림픽’은 이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윤 의원의 주장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금기를 깨는 첫 균열이었습니다.
전북도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김관영 지사는 "유치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라고 되받아쳤습니다. 논란 제기를 '외부의 방해'로 규정한 셈입니다. 그런데 정작 ‘10개 도시 연대 올림픽’ 유치 계획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와 현실적 제약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있습니다. 'IOC와의 대화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라며 어쩔 수 없다는 게 전북도의 입장입니다.
물론 전북도의 올림픽 계획이 조정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IOC가 이미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는 윤 의원의 단정적 주장은 일부 사실과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북도가 내놓은 불완전한 해명으로 올림픽을 둘러싼 회의론을 모두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회의적인 목소리는 점점 작아질 겁니다. 왜냐면 이미 전북의 올림픽 서사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이 서사를 처음 기획한 감독 겸 주연인 김관영 지사는 올림픽에 전북의 미래를 걸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 미래엔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명운도 포함돼 있을 것입니다. 아마 윤 의원의 페이스북 게시글을 접한 뒤, 김 지사는 만수처럼 이렇게 외쳤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전쟁을 치르는 거야'
■ 냉엄한 국제 경쟁, 어쩔 수가 없는 전북
전북도는 부인하고 싶겠지만 본선 경쟁력에 의문이 제기되는 사이, 숨 막히는 경쟁은 이미 총성 없이 시작됐습니다. 인도 아마드바드, 인도네시아 누산타라, 튀르키예 이스탄불 등 기라성 같은 도시들이 유치전에 뛰어든 상태입니다. 그중 카타르 올림픽위원회는 "도하 올림픽 개최에 필요한 스포츠 인프라의 95%를 갖췄다"라고 자신만만해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교될 수밖에 없는 전북도의 올림픽 추진은, 현실적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채 ‘우리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명분만으로 밀어붙이는 서사로 읽힙니다. 외부 시선에서는 치밀한 전략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설득하는 자기합리화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선사한 진짜 공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수가 저지른 살인보다 서늘한 것은, 그가 자신을 완벽히 설득한 순간입니다.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믿어버린 합리화, 여러모로 지금 전북 올림픽 추진 상황과 겹칩니다.
결말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전북도의 올림픽 도전이 국민적 관심과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더더욱 냉엄한 검증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건 정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